그리스 로마 신화 듣기

2026년 4월 18일

by HWP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읽게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읽는다’기보다 ‘듣는다’지만, 어쨌든 한때는 몇 번이나 도전했다가 번번이 내려놓았던 책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이 너무 어렵고, 너무 많았다. 제우스까진 괜찮은데,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비슷비슷하고,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이야기는 흥미로운데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완독’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낼 수 있을 만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김헌 교수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윌라로 듣기 시작한 것이다. 활자를 따라가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야기가 ‘소리’로 흘러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틀어놓고 듣는 수준이었는데, 이제 점점 익숙해지고 귀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반복의 힘이 컸다. 예전에는 한 번 보고 지나가면 사라지던 이름들이, 이번에는 계속해서 들으면서 자연스레 귀에 들어왔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최근 달탐사 작전 이름이기도 하여 더더욱 익숙해졌고, 에우로페는 유럽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스토리로 알게 되었다. 테세우스, 미노타우로스. 아이게우스… 처음에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등장하면서 억지로 외우려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아, 이 인물’ 하고 연결이 되는 경험이 생겼다. 이름을 외우지 못해서 포기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대견하기까지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은 꼭 눈으로 읽는 것만이 아니었다. 처음 우리는 책을 부모님이 읽어주는 동화책이나 옛날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받아들였으니 어쩌면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원래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라면 더더욱 듣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더 잘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귀로 따라가다 보니, 복잡하게 느껴졌던 서사도 훨씬 부드럽게 이어졌다.


또 하나 크게 달라진 점은,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 했다. 책상 앞에 앉거나, 조용한 공간을 확보해야 했고, 어느 정도의 집중 상태를 만들어야만 비로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디오북으로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조건’들이 사라졌다. 걷는 시간,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심지어 집안일을 하는 시간까지도 자연스럽게 독서의 시간이 되었다.


이게 단순히 ‘시간 활용’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집중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더 맞다. 눈으로 읽을 때는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고, 몇 줄 읽다가도 핸드폰을 확인하게 되는데, 귀로 듣는 동안에는 묘하게 그 흐름을 끊기가 어렵다.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 안에 머물게 된다. 눈으로 메시지를 읽거나 sns를 할 수도 있고 마치 라디오 드라마를 듣듯이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감각이 되살아난다.


물론 활자로 읽는 깊이와는 또 다른 결이다. 밑줄을 긋거나, 문장을 곱씹으며 멈춰 서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대신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는 힘은 더 강해졌다. 예전에는 중간에 포기했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하나의 긴 서사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이야기답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들이 있다. 시력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긴 시간 집중해서 활자를 읽는 일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한때는 ‘책은 역시 종이책이지’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그 생각도 조금은 유연해졌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가 그 이야기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느냐인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만난 것도, 어쩌면 그런 변화 덕분일 것이다. 예전의 방식으로는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이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게 생각보다 꽤 위로가 된다. 포기했던 책을 다시 펼칠 수 있다는 건, 단순한 독서 이상의 의미가 있으니까.


이번에는 이 긴 이이야를 '완독' 아니 '완청'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활자로도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름들이, 훨씬 선명한 얼굴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번 ‘완독’은 이미 충분히 값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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