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2026년 4월 27일

by HWP

한동안 어느 계절이건 제철 음식을 안주삼아 술을 먹는 모임을 게을리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봄이 오면 이미 한 발 앞서 산뜻한 나물이나 제철 생선들을 찾기 시작하고, 가을이 되면 월동 준비를 위한 기름진 음식들이 당기기 시작하여 그때마다 그런 음식과 함께 술을 달리던 시절... 그런데 한동안 그런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제철이라는 주꾸미를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나는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꾸미는 늘 그렇다. 매콤한 양념 속에서나 소금과 마늘에 마리네아트를 하거나 그 안에서 또렷하게 살아 있는 바다의 맛. 씹을수록 조금씩 풀리면서 은근히 끌어당기는 식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아니면 놓친다’는 계절의 타이밍이 겹쳐질 때 느껴지는 그 묘한 설득력까지 더해지면, 그 한 접시는 단순한 음식이라기보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가깝다.


오늘 찾아간 식당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십여 년 전, 꽤나 독특한 방식으로 ‘주꾸미집 헌팅’을 당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상황은 거의 한 편의 짧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모르는 남녀가 연결되기에 전혀 로맨틱한 분위기도 아니고 낭만적인 메뉴도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우리도 그들도 주꾸미를 다 먹어가던 그 시점에 어색하지만 설래이게 연견 된 인연으로 우리 6명은 2차를 향하게 되었으니...


같은 장소, 비슷한 시기에 그 안에 앉아 있는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했다. 주꾸미를 한 점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서, 문득 그때의 내가 떠올랐고, 그 기억 속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래도 잘 버텼네’라고 말할 것 같다는, 약간은 쓸데없는 상상까지 따라왔다.


아마도 제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지금 가장 맛있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계절의 문 같은 것이어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현재뿐 아니라 과거의 어느 장면과도 뜻밖에 연결된다. 그 연결은 의도한 적도 없고, 준비된 적도 없지만,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주꾸미 한 점이 십 년 전의 어색하고도 웃긴 저녁을 이렇게 불러낼 줄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조금 신기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계획된 만남보다 훨씬 더 우연한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며 살아간다. 일부러 준비한 자리보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간 공간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고, 준비되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그 상황을 어설프게 넘기던 순간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일보다, 한 번쯤 스쳐 지나갔던 장소를 다시 찾는 일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곳에는 음식 이상의 것,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의 잔여 같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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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꾸미는 너무 맛있었다. 제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살아 있었고, 소금 양념이나 매운 양념이나 쫄깃한 씹는 맛이 소주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맛을 완성한 것은 접시 위의 음식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 남아 있던 나의 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과거의 나와 다시 마주 앉게 되었고, 그 만남을 굳이 의미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재의 나도 거기에 있었다.


계절은 매번 돌아오고, 음식은 다시 제철을 맞고, 우리는 비슷한 선택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만나는 장면들은 결코 같지 않다. 어떤 장소는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주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잠깐 멈춰 서서,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아마 삶이라는 것은 앞으로만 흘러가는 직선이 아니라, 이렇게 가끔씩 뒤로 접히기도 하고, 옆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결을 가진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주꾸미 한 접시처럼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의외로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를 과거와 이어주고, 또 현재를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들어준다. 그 사실이, 그날은 유난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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