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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Mar 13. 2024

외국어 공부로 회춘하다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3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는 건 다 비슷하긴 할 거다. 완전 초보로 새로 시작한다는 건 내가 가진 기존의 권위와 멋짐을 내려놓는 일이리라. 가령 내가 지금 수영을 배운다고 치자. 수영복을 입고 첫 수업을 들으러 가면 얼마나 뻘쭘할까. 물에 뜨는 것부터 시작, 아니, 뭐 호흡법이나 뭐 하여간 그런 것부터 하라고 하겠지. 잘 못하면 혼도 좀 날 것이고. 그런 게 쑥스럽고 싫으면 영영 수영은 못 배울 것이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스노클링은 꼭 해보고 싶다고 하니 딸냄이 그건 수영 못해도 할 수 있는 거란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기왕이면 수영을 좀 배워 깊은 물에 들어간 공포는 극복하고 맑은 물속 물고기들이랑 눈을 꼭 맞춰보고 싶단 말이다. 완전 초보, 일곱 살, 새로 학교 들어간 어린이 같은 공포와 긴장을 극복해야겠지만.     


처음 물에 들어간 어린 아이처럼

스페인어를 새로 공부하는 기분도 그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나는 학원을 니는 학원을 다니는 게 아니니까 긴장감은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울 때마다 무지하고 무구한 어린 영혼이 된 기분이다. 비유하자면 처음 영어를 배웠을 때 마음 비슷할 것 같다. 우리 때는 중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ABC를 배웠으니까 말이다.      


잘 안 외워지는 스페인어 단어가 몇 있다. 공 pelota, 화내다 enfadada, 독감 gripe, 비누 jabón, 견디다 aguantar 이런 것들. 아, 단어 외우는 이야기를 좀 해볼까?

아들딸들이 영어 공부할 때 단어를 쓰면서 외우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안 쓰고 그게 외워지냐? 아이들은 오히려 단어를 왜 쓰면서 외우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나도 영어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아무리 외우려 애써도 잘 되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처음엔 나이가 들어 안 외워지는 줄...) 단어장이나 깜지를 들고 단어를 외우던 우리 방식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지금 내가 외우고 있는 스페인어 단어는 단어장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단어카드를 정리한 것도 아니며 일부러 깜지를 써서 외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절로 외워지는지 신기하다. 그래, 글부터 배우지 않고 소리를 들으며 말을 먼저 배워서 그런다. 팟캐스트를 통해 공부하기 시작했으니까. 

     

박박 쓰면서 단어외우기는 이제 그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글씨로 쓰는 공부를 안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나는 종이를 많이 쓴다. 말로 외운 것도 종이로 써보는 재미가 있다. 말과 글의 교차검증이랄까. 하지만 ‘단어를 외우기 위해’ 반복해서 종이에 써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배운 문장을 작문으로 복습하는 방식을 쓰는데 이걸 반복하다 보면 단어가 저절로 외워진다. 그리고 유튜브 화면을 보면서 공책 정리를 하다 보니 글자의 이미지가 머리가 남아서 외워지기도 한다.     


대학생 무렵 TV에서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물을 방영했었다. 공포물을 못 보는데 그 시리즈는 너무 재미있어서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하는 걸 안 볼 도리가 없었다. 무서워서 동생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봤던 것 같다. 그냥 공포물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과학이론에 근거를 둔 것들이 많은 미스터리물이었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그림자 이론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구현한 드라마는 지금 생각해도 명작이다. 


한 왕따 당하는 초딩(짐 Jim이라고 하자)이 못된 녀석들에게 얻어맞고 울며 집에 가고 있었는데 웬 키 큰 검은 옷의 사나이가 나타나 “난 네 그림자다. 널 괴롭힌 녀석을 내가 혼내 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녁마다 나타나 널 괴롭히던 그 못된 녀석(존 Jon이라고 하자)에게 어떻게 복수해 주랴 묻는다. 착한 짐은 처음엔 존이 선생님한테 혼났으면 좋겠다, 계단에서 엎어져 망신당하게 해달라, 순진한 복수를 꿈꾼다. 그 복수가 모두 실현되는 걸 본 짐은 점점 수위를 높여 가혹하게 존을 괴롭히게 한다. 고열에 시달리고 다리가 부러져 통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는 존... 그리고 결국, 길에서 또 다시 그림자맨을 만난 짐은 “아저씨, 안 되겠어요, 존을 죽게 해주세요.”라 말한다. 그러자... 그림자맨은 짐의 멱살을 틀어쥐고 높이 들어 흔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존의 그림자다!” 


그래, 누구에게나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 그걸 잘 다스리지 못하면, 또 바람빼기를 잘 하지 못하면 하이드 씨와 같은 범죄와 살인충동이 남을, 또는 자신을 해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그런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드라마 말미에 보여준 것이다.   

  

<환상특급>, 낯선 언어를 만났을 때에는

하지만 그 시리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내가 출근을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갓난아이를 두고. 어수선한 집구석이지만 아내와 아기에게 출근뽀뽀를 하고 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 

집에 와서 ‘달링, 아임 호옴’하고 외쳤지만 아내는 없다. 아기도 없다. 집은... 아침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유모차가 있고 설거지통엔 씻지 않은 우유통도 있고 장난감이며 아기가 보던 그림책이 있다. 아기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림책은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사과 그림 하나 있고 밑에 ‘사과’, 아, 미국 드라마니까 apple, 이렇게 써있는 조그맣고 네모난, 아니 각진 부분이 둥글려져 있는 유아용 그림책. 


아내가 아기를 데리고 장에 갔나 싶어 무료한 남자가 아기 그림책을 들어 보는데, 어머? 그림책이 이상하다. 사과 그림 밑에 이상한 글씨가 있는 것이다. 생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글씨가. 그리고 신문을 펼쳐본다, 분명 익숙한 정치인의 얼굴 사진인데 그 밑에 있는 기사를 읽을 수가 없다.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유재석... 아니 어제 보던 익숙한 그 프로가 나오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외계어 같다! 


곧 아내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허니, 어쩌고 퇴근뽀뽀를 하고 싶은데 아내도 이상한 말을 한다. 남편의 선택은?

자기만 못 알아듣는 낯선 언어의 혼란에 빠진 남편이 한 일은 바로 아기의 그림책을 집어드는 것이었다. 사과 그림을 가리키며 그 낯선 언어를 읊조리는 것. 그렇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난다.


그 드라마는 어쩌면 분열증이 시작된 사람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속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따로 논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마음속 세계에 파묻혀 사는 일. 병동에 갇혀서 허공을 바라보고 자신의 망상을 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분열과 망상을 겪는 사람들이 현실을 살지 않아도 된다면, 혹은 그 망상의 세계를 누군가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아도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기에 두 개의 세계가 혼합되는 과정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선택은 현실의 언어를 새로 배우고 정립하는 일이다. 드라마의 남자는 분노하고 화내고 헷갈리는 대신 얼른 새 언어를 배우는 일을 선택했던 것이다.  

   

스페인어는 열세 살이다

누군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 매우 공감한다. 하나의 인생을 살면서도 여러 겹의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다양한 경험일 터인데 그중 강력한 기제가 바로 외국어다. 한국어로 말하는 세상과 영어로 읽는 세상은 매우 다르다. 스페인어로 상상하는 세상은 또 다르다. 내 안에 스페인어 문장들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또 다른 세계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은 내 머릿속에서만 열리는 문이지만, 아니 문도 아니고 그 왜 있지 않나, 옛날식 창문, 밑에서 들어올려야 열리고 중간에 걸쇠로 고정해야 하는 삐걱거리는 창문, 그 창문의 맨 아랫단을 조금 연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 작은 틈새로 바깥에서 삼나무 향기가 밀려 들어온다. 

스페인어로 문은 뿌에르따 puerta, 창문은 벤따나 ventana다. 창과 문을 통해 새 언어들이 슬금슬금 들어오고 확 밀려 오고 비집고 들어오고 밀치고 들어온다. 그 모든 과정이 사춘기에 새 공부를 시작할 때, 새 친구를 만날 때, 짝사랑을 시작할 때, 그이와 처음 말을 걸었을 때 같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스페인어는 열세 살, 사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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