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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주 Nov 12. 2023

계모라는 것이... 동화 속 계모보다 훨씬 잔인해.

가스라이팅도 하거든. 

 내가 지금 아이 셋을 키우는 40대 여자로서 돌아보면, 내 계모는 인간 이하의 여자다.

우리 아이들과 일상을 보내다보면 그 어린 아이들을 어찌 그렇게 대했지 싶은 대목이 많다.

 



 내가 12살, 내 동생 철휘가 8살 일 때에 우리아빠는 재혼을 했다. 우리 아빠는 당시 나이가 30대 후반이었으니 지금 나보다도 어린 나이이다.


 나는 네 살 때부터 엄마가 없는 아이였다.  8, 90년대에 홀애비 자식이 얼마나 홀대받으며 살았던 시대인지 지금 사람들은 모를거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에 내 동생 철휘는 생후 4개월 아기였다. 나와 철휘는 서울 상계동 고모집에 맡겨졌다. 어린 시절 서울 살이는 기죽어 지내던 기억이 거의 다다.

 어떤 여자는 "쟤는 엄마 없으니까 우리 ㅇㅇ는 쟤랑 놀지마." 라는 말을 내 눈 앞에서 했다. 그냥 엄마가 없어서. 그게 이유이다. 나는 그 것이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라 슬프게 느껴지지조차 않았다.

 내 1학년 담임은 내가 엄마 없는 아이라고 아주 차별했고 나는 매일 매일 혼났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두려워했다. 하루는 종례시간에 이가 빠져서 입 안에 피가 막 머금어지는데(보통 7-8세가 되면 어린이들은 이갈이를 한다.), 난 선생님한테 또 혼날까봐 입술 틈으로 피가 줄줄 흐르는 데도 종례가 끝날 때까지 참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홉 살이 되고, 철휘가 다섯 살이 되자 아빠는 우리 남매를 서울 고모집에서 다시 아빠에게로 데려왔다. 고모가 간 암으로 돌아가셔서 더이상 우리를 고모집에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매는 아빠 공장 바로 밑에 조립식 건물에서 살았다. 밥은 공장 식당 아줌마가 해주셨다. 

 아빠는 군납 관련 일을 하셔서 일 년에 몇 차례 입찰을 간다고 집을 떠나 몇 일을 출장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초등학생인 우리는 밥은 공장 식당에서 아줌마가 주는 밥을 먹고, 집에 와서는 알아서 씻고 알아서 숙제하고 제 시간이 되면 자야했다. 9살, 5살 어린이 둘이 말이다. 불끄고 자는 시간이 제일 무서웠다. 

그냥 불을 켜 놓고 자면 될 걸... 왜 불은 꼭 끄고 잤을까?



 통도관광호텔이라고 지금은 요양병원으로 바뀐, 통도사에 있는 호텔 식당에서 우리는 계모를 처음 만났다.

아빠는 그 여자를 처음 본 자리에서 귓속말로 "연주야, 가서 엄마라고 불러-" 라고 시켰다.

 나는 수줍게 "엄마~" 라고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하하하 웃으며 아주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뒤 우리는 양산 소토리에 있는 한 아파트에 다같이 모여서 살게 되었다. 여자가 데려온 대학생 아들 한 명, 고등학생 아들 한 명, 나, 철휘까지 여섯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강아지도 두 마리 키우고 남들 보기엔 식구도 많고 유복해보이는 행복한 집이었다.


하지만 나와 철휘는 고통받고 있었다.


"어유- 연주는 눈이 너무 일자여서 아가씨 되면 화장해도 눈이 안예쁘겠어~~ 어떡해 여보, 쌍커풀 수술 안해주면 안 될 얼굴이야~"

"연주야, 너는 어쩜 걸음걸이가 그렇니? 엄마처럼 조신하게 못 걷겠니?"

"연주는 어쩜 남자같이 저렇게 몸에 털이 많을까? 엄마 좀 봐라, 매끈하게 여자 몸이 이래야지 털이 많아가지고 어쩌니?"

"눈썹은 숱검댕이같이 시~~커매가지고, 남자같다. 오호호호"



난 내가 못 생긴 줄 알았다.

진짜로.

난 내가 남자같고 못 생겼다고 생각해서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애를 왜 좋다고 하지. 거짓말이겠지. 나는 남자같고 털도 많잖아.'


나는 내가 못 생긴 게 아니라는 걸 20대 중반 쯤 되어서야 깨달았다. 진짜로- 


계모는, 개모다. 犬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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