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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쓰다

by 은규 Jan 01. 2025

볕이 낙낙한 운동장, 학교 행사로 아이들이 반별로 줄을 맞춰 서 있다.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발 앞꿈치로 바닥의 흙을 일 쓸었다 저리 쓸었다 하며 지루함을 때웠다.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 한 분이 줄 사이를 오가며 나른한 낮에  바람처럼 말을 건네주신다.  

"장래 희망이 뭐냐?"

" 저요. 노벨문학상이요!"

당찬 대답에 요놈 봐라 하면서도 인자하게 웃으신다.

' 그래 뭐든 꿈꿀 수 있는 나이니까.'

하지만 꿈은 잘 잃어버리기도 한다.


책 읽는 게 뭐 별거라고, 주변에선 대단하다고 말을 한다. 칭창만 하면 좋은데 내용이 뭐냐고 덧붙인다. 그냥 읽으면 안 되는 건가. 드라마처럼 재미나게 읽고 끝나면 안 되는 건가.  내용을 묻는 질문에 늘 당황스럽다. 나는 책 속의 내용은 잘 잊어버리고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편이다.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읽고는 도시 주변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뮌스터 공원, 역사와 현재의 삶을 연결하는 사색의 자리가.

문보영의 '일기시대'는 엘리스의 토끼가 튀어나올 것 같은 발랄한 상상을 주는 도서관 오가는 길이.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읽는 동안은 책과 함께 끙끙 앓았지만, 주인공 소아레스가 사무실에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거리가. 이미지로 남았다.

책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공원에서 책 한 권 끼며 거닐며 사색하는 것이 소망이 되게 했고 우리 동네 도서관 길에도 재미난 풍경이 있나 기웃거리거나 집에서 보이는 거리를 새롭게 조망하게 했다.


나의 하루는 다른 사람들보다 두세 시간 일찍 시작된다. 공휴일과 토요일도 일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간관계가 자꾸 끊어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할 장소가 필요했다.

   SNS 상에서는 말 아닌 글로 대화한다. 얘기를 잘하고 싶으면 글을 잘 써야 했다. 하고 싶은 말들은 글로 전환되면서 낯설고 어설프고 어려워졌다.  종일 담아 두었던 말도 글로 적고 보면 두세 줄이 고작이었다.  맞장구를 치는 댓글부터 작은 표현을 더듬거리며 적었다. 돌아서면 썼던 글이 후회돼서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한두 줄은 열 줄이 되고 일상의 인사는 일렁이는 생각들로 옮겨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집중하는 순간이 좋았다.

글로 떠들며 웃고 감동을 표현했다.


' 기억하기보다는 흘려보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시간을 흘려보내고 잡념을 흘려보내고 알아야 한다는 욕심도 흘려보낸다. 간격 넓은 내 무지의 에 책들을 흘려보내다 보면 눈에 띄지 않아도 이끼나 이물질이 묻어 날거라 생각한다.

하루 이틀... 시간에 의해 그것들이 두터워지면

러진 미세한 반짝임들이 무늬가 될 것이다.

그 그림이 나를 조금은 변화시킬 거라 여긴다.'

가볍게 읽고 싶었던 독서는 결국은 쓰기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동전처럼 읽기와 쓰기를 양면으로 두고 있다.

읽을 때는 밖에서 나를 안아주는 것 같고 쓸 때는 내 쪽에서 세상으로 팔 벌려 나가는 것 같다. 어릴 적 호기롭게 말했던 꿈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다른 바람이 생겼다. 허수경이 거닐었던 거리와 공원, 문보영의 상상이 풍요롭게 했던 길, 페소아의 시선이 담긴 거리, 그 곁에 내가 바라본 길을 나란히 놓을 수 있도록 일상에서 다니는 거리를 찬찬하고 조용히 바라보며 사랑하는 것이다.


뜨거운 낮이 지나고 동네를 산책 삼아 걸었다. 차분 해진 오후의 그늘에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의 걸음도 여유롭다. 그 사이로 배낭을 멘 젊은 아빠가 스치듯 가르며 뛰어간다. 앞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큰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작은 아이는 킥보드를 밀고 간다. 젊은 아빠는 두 아이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혹시 다칠까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까 살핀다. 킥보드가 서툴러 차도로 엇나가지 않을까 작은 아이가 가는 쪽으로 뛰었다가 멈추었다가 뛴다. 뒷모습에 다정함이 배어 있다. 아이들에게 집중한 아빠의 몸놀림과 호흡이 거리에 따스하게 퍼진다. 예전에는 그냥 스쳤을 풍경 하나가 마음에 적혔다.


202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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