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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Feb 21. 2024

2. <싯다르타> 내가 타인을 바꾸는 게 가능할까?

헤르만 헤세(1922)

진짜 자기계발, 정답 대신 질문.

<책의 질문>


안녕? 난 <싯다르타>야. 헤세 형이 무려 1922년에 지어주셨지. 난 그만큼 오래됐단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날 찾고 있으니, 인생 헛살지는 않은 것 같지?


싯다르타가 누군지 아니? 맞아. 너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이야. 풀네임은 고타마 싯다르타지. 눈치 빠른 사람은 알겠지? 부처님은 신이 아니야. 인도 계급제인 카스트 제도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제 계급 '브라흐만(바라문)'의 샤카(석가)족에서 태어난 엄친아 중의 엄친아였단다. 그런 분이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속세의 모든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신 거야.


TMI 하나 더 풀게.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계신 게 아니야.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깨달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일곱 분의 부처가 계신다고 해. 그중에 우리한테 가장 많이 알려진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인 거지. 우리가 아는 관세음보살님도 실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분이셔. 그런데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 자비의 화신이 되셨지. 그러니까 너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단다. 어때, 자존감 뿜뿜이지?


각설하고.


내 이야기는 싯다르타 소개로부터 시작해. 싯다르타는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걸로도 모자라 잘생기고 매너 좋고 총명한 사람이었어. 부모님은 싯다르타를 자랑스러워했고, 친구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뭇 여인들은 그를 보며 사랑의 열병을 앓았지. 하지만 싯다르타는 늘 질문으로 가득했어. '나는 누구이며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고 싶었지. 하지만 절친한 벗도, 존경하는 아버지도, 지혜로운 선조들이 남긴 철학과 종교도 답을 주지 못했어. 그래서 싯다르타는 집을 떠나 다른 수행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기로 마음먹었지.


아들을 일생의 자랑으로 여겼던 아버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어. 요즘으로 말하자면 모두의 존경을 받는 대형 교회 목사의 아들이 가족과 연을 끊고 이단으로 낙인찍힌 종교에 몸 담겠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넌 아무 깨달음도 얻지 못할 거다. 넌 헐벗고 배가 고플 테지. 아니야, 넌 죽을 거다.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 제사를 지내며 네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 보자."


하지만 싯다르타는 끝내 고집을 꺽지 않았고, 아버지는 울며 아들을 보내준다.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A4 1장으로 서술하시오(10점).


싯다르타는 그 길로 출가하여 방랑하며 수행하는 '사문'이 돼. 절친인 고빈다도 싯다르타를 따라오지. 극단의 금욕주의자들 사이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굶어가며 수행하지만 싯다르타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해.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은 자', 즉 '부처'라는 명성을 얻어 구름 떼 같은 인파를 몰고 다니는 '고타마'를 만난다. 내가 앞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풀네임이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했잖아? 그래, 고타마가 싯다르타고 싯다르타가 고타마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헤세 형은 고타마와 싯다르타를 쪼개서 두 개의 인격으로 등장시켰어. 재밌지?


아무튼 고타마의 설법을 들은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완벽한 설법 속에서 작은 틈새를 발견해 질문한다. 고타마는 말은 시비를 일으키게 마련이라며, 자기 말에 매달리지 말고 해탈에 집중하라고 조언해. 싯다르타는 끝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지. 하지만 절친이었던 고빈다는 고타마의 설법에 흠뻑 빠져 고타마 곁에 남는다.


싯다르타는 곧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한 마을의 유명한 기생, 카말라였지.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통해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행복을 느껴. 어린애처럼 본능적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싯다르타는 '나는 육체적 쾌락보다 더 고차원적인 쾌락을 알고 있고, 물질적 행복 따윈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 자기만 홀로 고고하다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싯다르타는 점점 어린애 같은 사람이 돼. '까마귀 노는 물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싯다르타는 이제 쉽게 화를 내고 조급해하고 조금의 허기도 참지 못하지.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낀 중년의 싯다르타는 그렇게 훌쩍 카말라를 떠난다.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재산도 다 버리고 말이야.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그 마을에서 벗어나기로 한 싯다르타는, 그 옛날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자신을 공짜로 건네주었던 뱃사공을 만나. 그 옛날에도 뭔가 해탈한 사람의 느낌을 풍겼던 뱃사공에게 이끌린 싯다르타는 뱃사공을 따라가 함께 살기 시작해. 그리고 뱃사공의 일을 도우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깨닫게 되지. 뱃사공은 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흐르지만 늘 거기에 있는 강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뱃사공의 집을 지나던 카말라가 아들과 잠깐 쉬던 중 뱀에 물려 죽고 말아. 싯다르타는 카말라 곁에 남은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뱃사공의 집에서 키우기 시작해. 하지만 아들은 이미 버르장머리 없는 졸부 2세로 자란 상태였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했고, 아랫사람한테 갑질도 서슴지 않았지. 싯다르타는 어떻게든 아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해. 하지만 아들의 패악질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아버지에게 막말까지 하기에 이르지. 보다 못한 뱃사공은 싯다르타에게 이렇게 말해.


"그 옛날, 당신이 바라문이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집을 떠날 때 당신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소? 그때 당신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쳤소? 당신은 아들을 바꾸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아들을 자기 세계로 보내주시오."


싯다르타는 끝내 뱃사공의 조언을 듣지 않고 아들을 끼고 살지만, 결국 아들은 아버지 뒤통수를 치고 야반도주한다. 싯다르타는 구태여 아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아들과의 인연이 끝났다는 현실을 인정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반에 든 뱃사공을 떠나보내고, 홀로 강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지.


어때? 길고 철학적인 이야기지? 철학 고전이라 내가 좀 허세를 부리는 것 같니? 그래, 헤세 형이 좀 그래. 오죽하면 이름이 헤세겠어? 내 이야기에는 질문이 참 많단다. '정답 대신 질문'이라는 말을 책으로 풀어내면 <싯다르타>다, 이 말씀이야.


하지만 오늘 나는 깨달음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해. 그건 너무 어려운 얘기니까. 그 대신 네게 이런 질문을 해 보려고 해.


Q. 내가 누군가를 바꾼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싯다르타를 봐. 지금으로 따지면 아빠가 대기업 회장님인데 끝내 아빠 말을 듣지 않았어. 아빠가 "그럼 너 지금 맡고 있는 00백화점 지분 다 내놔!"라고 협박해도 "아, 예~"하고 떠났단 말이야.


고타마 싯다르타가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인데 헤세 형이 고타마와 싯다르타로 쪼갠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고타마가 그랬잖아. 말이라는 건 언제나 시비가 붙게 마련이니, 해탈에만 집중하라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을 붙잡고 늘어질 시간에 네가 어떻게 해탈할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뜻이겠지? 심지어 부처로 추앙받는 자신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네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늘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 보라는 뜻일 거야.


불교 경전에 유명한 말이 있지.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 친구가 "야, 나 매점 갈 건데. 같이 가자"라고 하면 "아니. 난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해. 그러니까 너도 혼자 가"라는 거야? 아니야. 다른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말고, 너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소리야. 어차피 넌 다른 말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꼭두각시잖아? 그러면 결국 상대도 네 말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을 것 아니야?


Q. 카말라와 뱃사공은 싯다르타의 삶에 영향을 주었어. 누군가가 내 말을 듣고 자기 생각이나 계획을 바꿨다면, 그건 내가 그 사람을 바꾼 걸까? 아니면 그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생각을 고친 걸까?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다면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거꾸로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내 생각을 바꾼다면,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내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도록 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길 바라는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나 자신을 깎을 수 있을지 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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