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둥이 육아 에피소드 2
오래 살고 볼일이다.
첫 아이 시절엔 없었는데 어느새 산후 조리원이란 곳이 필수코스가 되어있었다. 마지막이니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결코 저렴하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조리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드디어 신문물을 경험하는구먼. 들어온 순서대로 투명 네모바구니 안에 마트로시카 인형같은 신생아들이 줄줄이 누워있었고 아직 이름이 없어 태명이 적힌 이름표도 붙어있었다. 복덩이, 대박이, 아기곰, 토머스, 안젤라...... 그 틈에 당당히 딸 그레이스도 합류했다.
32주가 지나서야 딸이라고 병원에서 알려주었고 오매불망 기다린 딸이라는 소리에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 의사 선생님 손을 덥석 잡고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댔다. 노산에 그래도 딸이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첫 아이 때는 해산 해서야 성별을 알았다. 당시엔 미리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불법이었다. 친정 엄마도 딸배가 확실하다고 했고 딸이기를 바라며 이불이며 내복등 아기용품을 다 분홍색으로 준비해 놓고 (왜 파랑 아니면 분홍 둘 뿐인지) 아기 낳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진통이 시작되었고 초산치 고는 짧다는 6시간 만에 아기를 낳았다. 아픈 건 둘째치고 일단 성별이 너무너무 궁금했다. 마치 누군지도 모른 채 시집 장가가던 그 옛날 첫날밤이 되어서야 궁금했던 얼굴을 확인할 때의 설렘이랄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빨리 알려주세요 현기증 난다고요.
“아들입니다”
“아......”
간호사가 멍하니 누워있는 나에게 와서
“집안에 아들이 많으신가 봐요”
한마디 하신다.
우리 집안엔 딸이 귀했다. 대기하고 있던 엄마와 언니에게 아들이라고 했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둘이 마주 보며
“웬 아들?”
이런 반응을 보였단다. 꽃분홍 이불의 주인공은 아들이었다.
조리원에 들어와 몸은 편해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2주 동안 혼자 생활해야 하는 고등학생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한창 공부에 힘들 때인데 밥도 못 챙겨주고.
“아들, 조리원에 와서 아침 먹고 학교 갈래?”
조리원이 바로 집 앞이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남편들이 조리원에서 아침 먹고 출근하듯이.
“엄마, 누구 인생 망칠 일 있어요?”
아들이 기겁하며 화들짝 놀란다. 아차 맞다. 잘 못 소문이라도 나면...... 가뜩이나 동생이 오빠 판박인데 하마터면 아들 혼삿길 망칠뻔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먹방을 찍는 위대하신 분들의 전용 식기처럼 생긴 대야만 한 그릇에 미역국이 담겨 나왔다. 네 개의 위를 갖고 있다는 소도 아닌데 과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인가 감탄하며 식사를 하는데 신기한 건 싹싹 비워도 아직도 배가 안 부르다는 것이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껍데기여서 그런가 뭔가 먹어도 먹어도 허전하다. 그런데 배를 보면 여전히 불룩한 만삭이다. 나 아기 낳은 거 맞지? 배는 불러 있는데 배는 안 찬 느낌. 그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매 끼니마다 경험하며
“선생님, 조금만 더 주세요 ”
를 외쳤다.
조리원에서는 모유와 분유수유를 산모가 결정할 수 있는데 많은 산모들이 모유수유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을 결정한다. 첫 아이 떼는 아예 모유가 나오지 않아 초유도 생략하고 분유만 먹였다. 그런데 둘째 때에는 신기하게도 모유 풍년이었다. 유축기를 동원해 겨우겨우 20m, 30m 모유를 짜내는 산모들의 경탄해 마지않는 눈빛과 환호를 들으며 수유실 선생님께 160m 가득 찬 모유를 건네고 뒤돌아 나올 땐 잠시나마 연예인이 된 기분으로 우쭐했었다. 그런 내가 공포의 젖몸살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행위예술가도 아닌데 양배추를 양쪽 가슴에 붙인 희한한 모습으로 조리원 동기들의 위로 방문을 받아야 했다. 같이 입소하지 않는 이상 나가고 새로 들어오며 평균 일주일정도 함께 생활했을 뿐인데 군대 동기들처럼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어서일까? 가슴 열고 볼 거 안 볼 거 다 본 끈끈한 사이여서일까? 위로해 주는 조리원 동기, 아니 동지들이 큰 힘이 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지내는 조리원동기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그 귀한 인연이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