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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Oct 24. 2024

그날 밤의 추억

한 줄기 바람에도 행복했던 나의 여름 순간
- 블로그 씨의 질문





 시원하다. 빠르게 걷느라 송글송글 땀이 맺힌 얼굴을 스치고 가는 한여름 밤의 바람.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날이지만, 호수를 스쳐 흐드러지게 핀 장미 향을 묻히고 오는 바람은 에어컨 바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굳이 나섰다.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 시선을 줘본다. 맥주 한 캔씩을 사이에 두고 버스정류장 의자에 마주 앉은 젊음도 있고, 나란히 두 손을 잡고 발을 맞추어 걷는 다정한 노부부도 보인다. 운동기구와 한 몸이 되어 달밤체조 하시는 아주머니, 농구골대 앞에서 반바지 하나만 걸친 차림으로 연신 공을 던지고 받는 청춘들, 폐장시간을 연장한 놀이터 한쪽에서는 집에 가자는 엄마와 아직 한참 그네가 재미있고 술래잡기가 신나는 아이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그런 풍경의 사이사이, 배경은 온통 까만 침묵이나 그 나머지는 낮인 듯 환하고 소란스럽다. 여름만의 차분하고도 활기찬 밤 분위기가 왜인지 좋다.


 

  가끔 함께 걷던 공원을 오랜만에 아빠와 다시 걸었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셋이라는 거. 백일이 되기 전에는 아빠의 두 팔이 침대였고, 그 후에는 두 다리를 전용 의자로 내어준 하나뿐인 손녀가 함께 하니 전보다는 조금 더 소란스럽다.

"할아버지 우리 편의점에서 물 사 먹자"

"물만 사면 안 되지~ 아이스크림도 사자"

"안 돼! 물도 아이스크림도. 좀만 참았다가 집에 가서 마셔"

"치~"

속닥속닥

소곤소곤

ㅎㅎㅎㅎ

할아버지와 손녀의 비밀 작전을 모르는 척 일부러 저만치 앞에서 갔다.






세 달 전쯤, 내내 간 건강을 위해 약을 드시고 계셨던 아빠가 한동안 끊었던 술을 드셨다. 그것도 닷새를 연속으로. 엄마의 밭 일을 도와드리고는 온 가족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사위들과 마신 술 한 잔이 시작이었다. 그러고는 어쩌다 보니 이어진 약속들에 연거푸 이틀을 주사인 꼼짝 않고 주무시기를 보여주시는 아빠에게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을 흉내 내며 '이제 그만~'을 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 사는 큰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보내시고 다음 이틀도 벌게진 얼굴로 들어오셨다고 했다. 오랜만에 들어간 알코올은 아빠의 참을성도 함께 재워 버렸나 보다. 조용히 의식을 재운 사이 담낭을 괴롭혔는지 염증이 심해 제거 수술을 하셔야 한단다. 


 방학식을 막 마치고 온 아이를 데리고 3시간을 달려 입원하신 아빠를 뵈러 갔다. 큰 수술은 아니라지만 괜히 미웠던 아빠도 짠하게 보이게 하는 걸 보면 언제고 수술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젠 좀 편해졌을 법도 한데 아직 까다로운 입원환자 병문안 조건에 굳이 아빠를 응급실 앞까지 나오시게 했다. 런닝셔츠 차림 위로 한쪽 팔만 끼워 입고 나머지는 걸치듯 둘러쓴 환자복, 끼워 입지 않은 쪽 팔에 연결된 링거줄이 길게 늘어진 폴대를 밀며 저 멀리서 보이는 아빠. 남자는 나이 들수록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필요한가 보다. 엄마가 자리를 비웠다고 저리 티가 난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는 딸아이를 많이도 반가워하셨다.

"오느라 고생했어. 할아버지 수술 마치고 퇴원해서 집에서 보자~"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20분을 빠르게 달려 친정으로 갔다. 아빠의 수술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엄마의 갈비뼈 하나에 금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특별히 부딪힌 적도 없이 이게 웬일인지. 바로 입원을 하셔야 했지만 아빠의 수술 때문에 보호대에만 의지하고 계셨다. 간병인을 이용하자는데도 굳이 그 몸으로 아빠 옆에 계신단다. '평소 미워죽겠다며 아빠 흉보는 건 뭔데?' 속으로 엄마 흉을 보는 딸은 고구마를 몇 개 먹은 것 같다.


며칠이 지나, 감사히 수술을 잘 받으신 아빠와 갈비뼈 보호대 차림으로 달팽이처럼 다니시며 아빠 옆에 계셨을 엄마도 함께 돌아오셨다. 이제는 엄마 차례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에 바로 엄마를 입원시켜 드렸다. 필요한 거 없으니 오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를 뒤로 하고 시장부터 갔다. 아빠가 드실 반찬재료와 아이가 먹을 식재료를 구하느라 시장, 대형마트, 집 앞의 식재료 마트까지 훑고 다니니 두 손은 무겁게, 마음은 더 무겁게 변해갔다. 얼마나 병원에 계실지도 모르는 엄마를 두고, 나는 과연 아빠와 아이를 잘 건사하며 한 달 동안 집안일과 나의 일을 잘 꾸려갈 수 있으려나..


새벽녘, 쓰레기 차가 오기 전에 모아 놓은 것들을 내다 놓아야 했고, 때에 맞춰 아빠의 식사와 아이의 반찬을 준비하고, 매일 해야 하는 아빠의 수술 부위 소독과 집안일, 아이 공부와 나의 수업은 당연하고,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혼자만 계시게 해 마음 쓰이는 엄마를 보러 한 번씩 다녀오는 일까지. 옆에 있을 때도 해야 하는 줄 알면서, 할 줄 알면서도 엄마가 계시니 못 본 척했던 날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빠의 수술 일주일 후, 이제는 좀 편해지셨는지 거동이 자연스러워지셨다. 


"아빠, 우리 오늘부터 운동해요. 공원 걷자. 운동해야 빨리 회복한대요."


아빠와 함께 하는 운동, 대체 얼마만인지. 언제든 마음은 가득했지만, 집 근처 공원을 함께 걸으며 채웠던 시간을 더듬어 보니 흐릿하다.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며 아이와는 최대한 시간을 함께 보내려 애쓰면서도, 어째서 엄마와 아빠는 마냥 그곳에 있을 거라 언제든 기다려 주실 거라 우선순위에서 저 바닥 어딘가로 보내버렸는지, 마음 한 편이 쓰리다. 올 초에 받으셨던 고관절 인공관절 치환술 후에, 아저씨에 가까웠던 아빠의 모습이 이젠 할아버지 같아지셨다. 오른쪽 바깥 허벅지에 길게 난 수술 흉터에 더해 배에 몇 개 추가된 스태플 자국까지, 괜찮다며 티는 내지 않으셨지만 많이 힘드셨었나 보다.


아빠는 늘 그랬다. 안 아프다고, 안 힘들다고. 그래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엄마가 되면 그러는 줄 알았다. 아니, 아픈 건 아픈 거고, 힘든 것도 힘든 거였다. 부모가 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다만 내 아이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척쟁이가 되는 거였다.



아빠, 나는 우리 딸 엄마보다 아직 아빠 딸인가 봐.
척이 안돼. 척쟁이가 될 때까지 좀 더 아빠랑 걸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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