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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Nov 28. 2023

그것까지 닮았어?

1. 넘어지기 달인

어릴 때 자주 넘어졌다. 까지고, 까진 데 또 까지고.

“엄마가 식은 밥만 주니? 왜 만날 넘어져!”

어린 나는 대꾸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조금 더 큰 나는 ‘뭐 이 정도야’ 한다.

2. 윙크걸

초4, 시화전을 위한 액자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필름 한 장이 아까운 시절에 자꾸 눈을 찡그리거나 감아 버리는 내게 선생님은 짜증을 내셨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3. 잉여 인간

오래전 사촌 언니네와 저녁을 먹던 날, 나만 빼고 모두 양 혹은 원숭이가 되어 대리운전을 불렀다. 난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혼자 상처를 받았다. 스스로가 잉여스러워서.

4. 버릇없는 년

가끔 길 가다 먼발치에서 스치는, 말 그대로 ‘지인’. 가까운 사람 외에 실루엣만으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지나가면 십중팔구 들려오는 소리, ‘보고도 인사 안 하고 가더라, 싸가지 없이’.

    

 1,2,3,4, 그 외 많은 일들이 왜 내게 일어나는지 몰랐었다. 중1 때부터 쓰던 안경이 3학년부터는 도수를 바꿔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스물셋에 대학병원 정밀검사까지 하고야 약시 때문이란 걸 알았다. 어릴 때 발견하면 치료가 되는데 커서는 의미가 없단다. 거기다 고1 체육 시간, 강하게 날아오는 피구공에 정면으로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이 많이 좋지 않은 난 나이 들면 힘이 덜한 쪽 눈동자의 정렬이 풀릴 수도 있다고. 추가로 사회 책이 수면제였던 고2의 나는 차에서 책 보기를 6개월. '난시 추락'이라는 말도 들었다. 좀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차 안에서 급하게 화장을 하던 어떤 날, 모나리자에게 눈썹을 선물하려던 내 옆에서 말을 걸던 남편에게 대꾸하려다 손과 입, 뇌의 협응에 실패했다. 아이브로우 브러시가 눈썹 대신 각막을 쓸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시베리아 한복판에 눈꺼풀 없이 눈만 내놓은 것 같고, 코끼리가 안구 위에서 펌프(DDR 비슷한, 아시려나요?)를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눈을 의사에게 보였더니 ‘각막이 많이 긁히셨네요, 약 넣으시고 2주 뒤에 오세요’. 2주 뒤 아이와 함께 갔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 마주 앉혀놓고 얘기를 했었다. 나를 보고 있어야 할 눈동자가 나를 뚫고 그 뒤 어딘가를 보는 듯했다. 훈육의 시간은 몇 번 있었지만, 여전히 그 눈빛은 반항의 그것인가 생각만 하고 넘어갔다. 궁금했지만 뭐라고 꼬집을 만한 이상이 없어 시간만 보내다 안과 가는 김에 데려갔다. 다행히 내 것은 괜찮았다. 대신 아이 눈에 문제가 있었다.

     

간헐성 외사시

간헐성, 그래서 몰랐을 거란다. 많이 피곤하거나 멍하게 있을 때 한쪽 눈의 정렬이 틀어진다고. 그 각이 25가 넘으면 수술만이 답이라며 얼른 큰 병원에 가보라 신다. 담담하게 답하며 소견소를 들고 나오던 길, 계단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심장도 함께 내려앉았다. 나 때문일까. 내가 품고 내 배 아파 낳았는데 왜 아빠를 더 많이 닮았냐는 투정을 부렸었는데 이런 건 날 닮아버린 걸까. 투정 부려서 벌 받은 걸까. 너는 나처럼 추운 날 버스, 택시 기다리느라 떨지 않기를, 더운 날 한껏 물을 먹어 흐물 해진 휴지상태로 출근하지 않기를, 보름달은 하나로만 보이기를, 오해를 이해로 바꾸느라 애쓸 일 없기를. 당연한 듯 바랐던 그 마음이 욕심이었을까. 내 눈의 이유를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시던 나의 조물주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같은 경험을 통해 마음으로 아는 것은 그 온도 차가 크다. 엄마란 존재는 늘 그렇다. 자식의 문제가 자기 탓이라는 생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그랬던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나를 질책했다.    


“선생님, 저와 아이 아빠의 눈이 좋지 않아 아이도 검사 한 번 해보려고요.”

“애가 뭘 알아? 숫자라도 읽어야 검사를 하지! ”

“숫자 알아요.”

“애 엄마가 애를 공부시키느라 들들 볶아댔구먼!”

“혼자 알았는데요!”

 

아이가 세 살 때의 일이다. 만 3세 정도면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여도 안과 검진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눈이 콤플렉스인 나는 공중화장실 문 앞에서 다리를 X자로 꼬고 있다 열리는 문 틈으로 재빠르게 들어가는 사람마냥 아이가 세 살이 되어가자 안과 문 앞에 서 있었다. 세 살만 되면 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리. 숫자송을 따라 부르고 목욕책의 숫자를 보며 아이 혼자 알게 된 숫자와 컴퓨터 시력 측정 기기를 믿고서. 하필 불친절한 의사를 만나 내가 괜히 수선인가 싶었지만, 결과는 약한 근시가 있었다. 아이 검사 결과를 받은 막돼먹은 의사는 욕쟁이 할머니가 외상을 해달라는 손님 앞에서 급히 태세전환을 하듯 어느새 예의바른 세상 다정한 의사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의사의 처방대로 하루 30분 이상 햇볕 아래서 놀게 한 후로 자라는 동안 시력도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었고 겉으로 봐도 별문제가 없어 보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은 또다시 유난 떤다고 혼내는 의사를 만날까 봐 상처받기 싫은 어리석은 마음에 ‘괜찮겠지’ 하고 넘긴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치료를 위한 수술은 공막(흰자위)을 직접 열어 안구를 움직이게 하는 6개의 근육 중 문제가 되는 근육을 상황에 맞게 조절하고 다시 꿰맨다고 한다. 눈동자를 움직이면 실밥 때문에 불편할 텐데, 한 달간이나 토끼 눈으로 지내야 한다는데. 두려움이 아이를 덮칠까 겁이 나 별일 아닌 척,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고 수술하면 다 나을 거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사실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내 유전자를 탓하고 멍청하리만치 시간을 보내버린 과거의 나를 탓하느라 정신은 정상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안질환 관련 카페를 뒤지거나 전국의 대학병원에 전화를 해보는 일로 하루를 채웠지만, 관련 전문의로 유명한 곳은 이미 2025년 중반까지(2023년 3월 말 기준) 예약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아이는 만 10세가 되었다. 눈은 만 10세까지 발달하는 것으로 보기에 그전과 후의 치료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원망했던 큰 이유였다.

     


 온라인 카페에는 아기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질환을 알게 되었고 가림치료를 6세까지 한 후 수술 없이 완치되었다는 후기도 있었다. 아기도 엄마도 힘들었겠지만 잘됐다 생각했는데 며칠 뒤 아기 엄마의 글이 올라왔다. 아이 눈 완치 판정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자신이 암 3기 선고를 받았다고. 자신이 암 환자가 되어 관련 온라인 카페를 찾아보니 자신처럼 아이의 병치료에 전념하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엄마들이 암에 걸린 경우가 많다며 제발 자신을 먼저 돌봐달라는 외침이었다. 그렇다면, 작은 일에도 심장이 떨어지는 나는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아주 작은 아기의 한쪽 눈을 적게는 하루 한두 시간, 많게는 여섯 시간씩 가리며 그 오랜 시간 불편함에 몸부림 칠 아이와 씨름할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속이 어떨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조금 늦긴 했지만, 입체시도 정상이고 시력도 잘 발달했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고, 수술은 필요하나 아직은 부모 외에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기에 다행인 거다. 


 이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깊이 사색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 같다. 그 과정에 감사할 일도 반성할 일도 다짐할 일도 또 어떤 날엔 낮은 숨을 쓸어내릴 일도 있었다. 혼자서, 속으로 오만가지를 생각하고 온갖 감정을 다 느낀 후 결론은 그래도 감사합니다’ 하는 일이 반복되며 엄마인 내가 조금씩 자라온 것 같다. 원망과 자책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다른 이의 불행을 보며 간사하게도 이젠 감사함을 말한다. 내 각막을 긁었던 브러시의 움직임조차 재희의 눈 상태를 알려주러 누군가 나를 도왔던 거라고까지 생각이 갔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던가. 극적이게도 2년 후까지 예약이 완료된 전문의에게 4개월 후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의사는 불안한 눈빛의 나를 보며 ‘재희는 엄마 아빠에게 예쁜 눈 건강하게 잘 받았다고, 보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뭔가 조금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으나 치료하면 되는 질환이니 괜찮다고, 만 10세 이전에 자신을 찾아왔어도 조금 더 지켜보자고 당장은 수술을 하지 않았을 거라며 혹시나 죄책감 가지지 말라’ 고 하셨다.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감사함을 말하고 문밖으로 나와 참던 것을 놓아버렸다. 시원하게 울고 난 후 이젠 ‘덕분에 여행’이라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병원을 나오는 길에 여러 아픈 아이들을 지나쳤다. 다시 한번 ‘감사’를 말했다.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는 심정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길에 다니는 수많은 차들을 운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눈이 안녕한 건가. 최소 시력을 아슬하게 넘기는 걸 시력 검진표를 외워서라도 나도 운전을 해볼까 하다 만다. 남편이 운전하는 그 옆에 앉아 가다 가끔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나 중앙선에 서 있는 사람을 바로 그 앞에서야 보는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바람이 부는 날 비옷을 입혀 아이와 등교하는 길에는 다시 욕심이 생긴다. 제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율주행 자동차를 안전성 높게 완성해 달라고 기도해 본다. 세상 모든 눈이 불편한 아이들이 시기적절하게 치료를 받아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와 함께.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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