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Mar 25. 2024

오늘 같은 날씨에 칼국수를 먹어야 하는 이유

혼밥 해보셨나요?

 

오늘같이 찬바람이 불면 아침부터 칼국수가 생각난다. 금방 담근 매운 겉절이와 함께 먹는 뜨끈한 칼국수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칼국수가 나오면 먼저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떠서 뜨끈하게 속을 두드려주고 이제 맛있는 칼국수가 들어갈 차례라는 걸 알려준다. 꼭! 국물부터 맛봐야 한다. 뜨거운 걸 잘 못 먹으니 칼국수면을 작은 그릇에 먹기 좋게 덜어 후후 불어준다. 너무 많이 불어도 안된다. 차갑게 식어버리면 칼국수의 참맛을 느낄 수 없고 촉촉하게 배어 있는 국물도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후루룩 후루룩 면을 빨아들이고 나서  매운 김치를 넣어주고 세 번 씹은 후 국물을 마시면 완벽 그 자체이다. 밀가루만 끊어도 건강해진다는데, 몽글몽글 달콤 달콤 폭신폭신 부드러운 빵을, 얼큰 칼칼 짬뽕을, 달콤하고 윤기가 흐르는 짜장면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라면, 비 오는 날에 우산보다 더 필요한 칼국수를, 매콤 달콤 하늘 아래 같은 떡볶이는 없는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어떻게 멀리할 수 있겠는가. 그냥 맛있게 먹는 거지.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칼국수를 찾게 된다.


 아침부터 칼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었다. 따뜻한 게 국물이랑 매운 김치. 면 한 번, 국물 한 번, 김치 한 번. 그 완벽한 조합을.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물었다.





"자기야, 지금 칼국수가 너무 먹고 싶은데 먹고 갈 수 있어?"

" 아니, 오늘 빨리 가야 해. 많이 먹고 싶어?"

"응, 아니면 나 혼자 운동도 할 겸 걸어가서 먹고 올까?"

"아니야~ 혼자 가지 말고 그러면 오늘 저녁에 같이 칼국수 먹으러 가는 건 어때?"

"음, 생각해 볼게. 그런데 너무 먹고 싶으면 혼자 갔다 올 수도 있어."

"알았어, 다녀올게."


' 너 혼자 먹고 오겠구나. ' 하는 표정의 남편에게

‘응, 맞아’ 하는 얼굴로 엉덩이를 두드려주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서둘러야 한다. 칼국수집의 오픈시간, 먹는 시간, 걸어서 돌아올 시간까지 모두 계산해서 이든이가 오기 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P형 인간은 이럴 때 가끔 본인이 사실은 J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뿌듯해진다. 욕실과 주방에 있는 수건들을 걷고 빨래바구니에서도 수건을 모두 골라냈다. 세탁기에 담고 세제를 넣고, 다이얼을 돌려 삶음 기능에 맞추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딥카키 색상의 고무장갑을 끼고는 따뜻한 물을 튼다. 전날 저녁과 오늘 아침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씻어 차곡차곡 올린다. 청소기까지 돌리고 나면 간단한 청소는 끝이 난다. 수건을 세탁기에 넣을 때에도 설거지를 할 때에도 칼국수 생각에 콧노래가 나왔다.


'칼~국수~ 칼~국수~ 오늘 같은 날씨엔 칼~국수
 칼~국수~ 칼~국수~ 혼자 먹어도 맛있는 칼~국수'


너무 먹고 싶은데 같이 못 간다면 혼자 가면 되지 뭐. 함께할 다른 멤버를 찾아볼 수도 저녁에 같이 먹을 수도 있지만 지금 먹고 싶다. 이 날씨에 혼자 걸어가서 혼자 먹는 칼국수라니.


혼자 길을 떠나서 식당을 찾아가는 일도 온전히 자신과 칼국수에만 집중할 일도 마음이 설렌다.


혼밥 - 혼자 밥을 먹는 것.
혼밥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른데, 자유롭고 편하니 혼자 먹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과 같이 먹는 것이 불편해서 혼자 먹는 사람도 있으며, 이유가 있으랴 그냥 밥 먹을 때가 됐는데 혼자라서 혼자 먹는 사람도 있다.


혼밥은 다 큰 것 같은 느낌, 어른이 된 느낌이다. 어른이지만 아직 덜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혼밥을 하고 나면 0.5cm 정도쯤은 더 자란 느낌이랄까.  갑자기 딱 먹고 싶은 메뉴가 떠오르거나 가고 싶은 식당이 떠오를 때 혼밥을 결심한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면 더 좋다. 요리사가 칼을 챙기듯 검투사가 검을 챙기듯(반성한다. 예시가 너무 거창했다.) 가방 안에 책 한 권을 넣고 필통에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세 가지 색이 나오는 볼펜 그리고 더 많은 색이 나오는 통통한 색연필이 들어간 작은 필통도 챙긴다. 식당에 도착해서 당당하게 문을 연다.





“몇 분 이세요?”

“혼자예요.”(당당하게 말한다. 사실 이 말을 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


자리에 앉아 바로 칼국수를 주문한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보다 조용한 시간을 추천한다.)  셀프바에 가서 금방 무친 겉절이를 집게로 들어 가위로 서걱서걱 자른다. 자르고 있을 뿐인데 이미 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빈 속에 먹으면 많이 매우니 조금만 먹고 칼국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배가 많이 고픈 날은 밥도 한 공기 퍼 담는다. 하얀 쌀밥을 김가루 접시 위에 돌돌 굴린다. 바삭 짭조름한 김가루밥을 한입에 넣고 매운 김치 한 조각을 먹다 보면 칼국수를 먹으러 온 건지 밥을 먹으러 온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바로 그때 잊을 뻔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락모락 하얀 김을 내뿜으며 달큰 짭짤한 게 국물 냄새를 풍기며 나를 잊은 건 아니지? 나 먹으려고 아침부터 서둘러서 온 거잖아? 하고 말을 건넨다. 국물 한 모금에 정신을 차린다. 잠시 흰쌀밥에게 빼앗겼던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주한다. 면 한 번, 김치 한 번, 국물 한 번. 알맞게 부드럽고 후루룩 넘어가는 면, 적당히 많이 맵고 아삭하고 짭짤한 김치, 줄어들수록 속상한 국물까지.





바로 이 맛 아닙니까.


잘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