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수오지심 없이 살아가는 인격 상실을 짙게 경험하고서 다시 이 작품을 마주하니 무진의 분위기가 더욱 텁텁하고 침울하게 느껴졌다.
근래의 개인적인 경험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현실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무책임을 긍정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불편하고 역겨웠다.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막연한 반감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감정들이 작품 말미에 조금은 가라앉았다. 적어도 작품 속 윤희중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기에.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조건반사였다.”
도피, 무책임, 방종, 고독, 죄책감, 정당화.
이 모두를 흐리게 덮는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안개는,
존재하지만 형체는 없는 “가시적인 환상”과도 같다.
구태여 안개 속을 피난처 삼아 향하는,
안개에 둘러쌓일 것을 알면서도 무진으로 걸어들어가는,
공허와 고독이 뒤따름에도 순간의 충동을 쫓는,
주인공의 애잔한 인생에 안타까운 마음을 한 조각 보낸다.
“그때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다소 천박하고 이제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버린 사어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무렵의 내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 나의 생활을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거나 말로 모두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오히려 덮어두게 된다.
또는 외려 아주 단편적인 단어로 대체해버린다.
그런 경우가 아주 많았다.
아무리 길게 쏟아내도 모든 것을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감정의 모든 줄기를 꺼내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잔가지를 가득 쳐내어 꾹꾹 압축해 눌러쓴 말을 보내기 꺼려졌을 때.
내 것이 아닌 글자들로 상대의 공감을 바라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비천하게 느껴졌다.
다듬어 쓸수록 가짜가 되어가는, 진심과 동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글자들.
잔뜩 적었다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글에 스스로가 질려 지워버리기도 했다.
진 빠지는 노력 대신에 차라리 너무나도 흔하고 빛바래고 간단한 말 하나로 넘겨버리는 게 나았다.
윤희중이 쓴 “쓸쓸하다”라는 말은 그런 단어였을 것이다.
분명 감정이 담긴 말이지만 침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
감정의 가장 극단은 결국 무감각이고 침묵이다.
초연해질수록 닳아있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