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할머니 댁에서 살았던 어린시절. 내 기억은 일곱 살 무렵부터 있다. 그 전의 기억이 거의 없어 할머니랑 오래 살았으려니 했는데, 성인이 되어 알고 보니 7개월 남짖. 엄마 혼자 일을 하며 나를 키우다 뭔가 여의치 않자, 할머니 댁에 나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고는 몇 개월 후, 엄마는 나와 둘이 살만한 방 한 칸을 마련해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엄마는 늘 새벽별을 보며 출근하셨고, 저녁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유치원 근처에는 못 가봤고, 종일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인형놀이를 하며 보냈고, 비슷한 또래였던 주인집 딸 아이랑 종종 함께 놀았다. 그 친구는 얼굴도 예뻣고, 옷도 예뻣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늘 집에 계셨다. 우리 엄마도 집에 있었으면. 자꾸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집 분들은 따뜻하고 좋으신 분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종일 집에 혼자 있는 나를 오며 가며 챙겨 주신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감사한 분들이다. 그렇게 엄마와의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어느 늦은 저녁, 엄마가 퇴근 후 집에 오셨다.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단다. 엄마는 서둘러 나를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낯설고 무서워 보이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엄마와 나는 절을 했다. 엄마가 참, 많이 울었다.
“선주가 보고 싶다. 한번 와라. 언제 올래?”
할머니의 전화에 하루벌이가 바빴던 엄마는 끝내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할머니 생전에 나를 데리고 찾아 뵙지 못했던 것이 못내 죄송해서, 엄마는 그렇게 많이 울었나 보다. 어릴 때부터 울보였던 나는 돌아가셨다는 의미도 잘 모르면서 우는 엄마를 따라 그저 많이 울었다.
“이제 그만 울어라.”
큰 아빠는 내 손에 50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그 동전을 받아 들고 점점 울음을 그쳤다.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캄캄한 장례식장 밖, 화단 어딘가에 아빠와 나란히 앉았다. 어색했다. 어색함을 피하고 싶었다. 아빠는 나와 함께 살기를 조금도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으레 형식적인 물음. 나는 조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엄마랑 살겠다고 했다. 예상한 대답이었겠지. 엄마가 내게 툭 터 놓고 이야기를 해준적은 없었지만, 아빠 없이 할머니와 살면서, 그리고 엄마와 살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셨다는 것을.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을까? 자라면서 그렇게 된 것일까? 다른 사람 눈치를 쓸데없이 많이 보며 살아왔다. 그날도 아빠의 눈치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던 나.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한껏 째려 보기라도 할 걸. 지금 같았으면 ‘엄마랑 산다고 할 거 알면서 왜 물어봐?’, ‘나쁜 새끼, 엄마랑 나 버리고 어디 잘 사나 보자’하며 욕이라도 실컷 해줬을 텐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그 날의 기분은 내 어설픈 글솜씨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나빴다. 평생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다는 정도로 해 두자. 그날 이후 단 한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다. 당연하겠지만 아빠와의 추억 따위는 내게 없다. 아빠에 대한 기억마저 이게 전부다. 아빠의 생김새, 목소리, 표정, 옷차림 그 어느 것도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아서 아쉽고, 떠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부모님의 이혼이 아빠의 외도 때문이라는 것을 어렸지만 눈치로 알고 있었다. 어려도 다 안다. 그 날 이후 아빠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아빠’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단어만 들어도 엄마가 슬퍼할까 봐. 나도 슬플까 봐.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래야만 했다. 엄마와 나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면서 살았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드러내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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