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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태홍 Sep 06. 2024

5km 마라톤 9번째- 시각장애인과 함께한 어울림마라톤

2024년 8월의 마지막날 아침,  6시 알람이 울립니다. 꾸물대다 보니 보니 벌써 30분. 벌떡 일어나 아침을 먹습니다. 먹으나 마나 한 분량이지만 배를 조금 채우니 전투력이 생깁니다. 오랜만의 마라톤입니다. 거의 두 달을 쉬었습니다. 한여름이라 이렇다 할 대회도 없고 너무도 무더우니 겸사겸사 쉬었습니다. 아직도 더위가 가시지 않고 있어, 오늘 어떻게 뛸지 걱정이 앞섭니다.   


가방은 놔두고, 혹시 모르니 휴대폰은 챙깁니다. 그리고 반바지, 반소매 차림으로 폭염에 뛸 준비를 합니다. 장소를 다시 확인합니다. 집결 장소는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 출발시간은 9시. 그런데 대회코스를 보니, 5km는 '(걷기)'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오잉? 다시 확인합니다. 5km 마라톤이 아니라, 5km 걷기 대회였네요. 10km 뛰는 사람들만 마라톤입니다. 신청할 때 잘 봤어야 하는데,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각오를 했는데, 마라톤을 뛰지 못한 것이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 무더운 여름날 무리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제10회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라톤대회'. 서울특별시 장애인체육회가 주최하고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장애인체육회 등이 후원했습니다.


집을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7시 10분입니다. 아침 기온은 23도. 시원한 가을 날씨입니다. 이 정도만 돼도 좋을 텐데 낮시간이 되면 또 뜨거워지겠지요. 5호선을 타고 천호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탑니다. 8호선은 자주 이용하는 전철이 아니라 생소한데 가락시장, 모란역 가는 노선입니다. 강동구청역을 지나 몽촌토성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호역은 풍납토성이고 이곳은 몽촌토성. 오늘은 백제 초기 왕궁터에서 산보를 합니다. 8시 20분, 역에서 내려서 바깥으로 나오니 바로 동쪽으로 세계평화의 문이 커다랗게 두 팔을 벌리고 맞이합니다. 



평화의 문을 지나 평화의 광장으로 들어갑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맡길 가방은 없고 집에서부터 달리기 복장으로 나왔으니 물품보관소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배번호를 받아서 가슴에 달고, 물을 나눠주는 데로 가서 물을 몇 차례 얻어 마신 뒤, 사람들 구경을 나섭니다. 


안내하는 사람에게 오늘 참가자 수를 물어보니 5km는 400명 정도, 전체 2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다른 안내원은 모두 3천 명이라고 합니다. 참가자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광장 안이 가득 찼습니다. 초등학생과 어린아이들도 여기저기 많이 보입니다. 10여 명이 함께 몰려다니는 것을 보면 엄마들이 함께 온 모양입니다. 외국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20명은 본 것 같습니다. 가족과 함께 온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동양의 외국인들은 겉으로 봐서 잘 모르니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서양인들 입니다. (나중에, 서양인들이 유독 많았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주한독일 상공회의소가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고 합니다. 참고: 도른 에밀리, <독일여자가 한국에서 고작 5km 마라톤을 뛰고 울컥한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SAe4U4qndbc)

 

연단 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체조를 하기도 하고, 누구누구의 인사말이 있고, 이러저러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체조를 할 때는 같이 몸을 풀었습니다. 스트레칭을 하고 좌우로 몸을 흔들고 팔다리를 쭉 펴니 더위에 늘어진 온몸에 긴장감이 생깁니다. 


소녀시대 가수 최수영 씨가 왔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연단으로 몰려듭니다. 저도 좋아하는 가수 얼굴을 보려고 부리나케 연단으로 달려 나가 셔터를 누릅니다. 요즘 배우 활동을 하는지 배우라고 소개합니다. 이 행사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유튜브나 방송을 통해서 보고 실물로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입니다. TV 화면에서 볼 때는 키도 크고 몸매도 풍성하고 복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실물은 얼굴도 조그맣고 몸매도 가냘픕니다. 같은 소속사 직원들도 10여 명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출발 준비를 합니다. 40대의 엄마와 20대 딸이 서로 붙잡고 가는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시각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누가 장애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얼굴 모습은 두 사람 다 정상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어떤 남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갑니다. 부부인 것 같은데 여성이 장애인입니다.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뒤를 따라가는데 여성분 역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장애인이 아닙니다.   


안내견을 데리고 나온 시각장애인도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다 안내견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주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안내견이 가까이 다가오는 저를 보고 경계의 눈빛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무섭다기보다는 순수하고 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시골길을 다니며 진돗개나 똥개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렇게 외국산 안내견을 보고 있으니 마치 어떤 서양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골격이 크고 눈이며 코, 입의 생김새가 매우 이국적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보고 있는데도 침착하게 주인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영리하고 총명한 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9시가 되어 10km 참가자들이 출발합니다. 10분 뒤에 5km 참가자들이 출발했습니다. 10km 참가자들은 여늬 마라톤 대회와 마찬가지로 서로 경쟁하듯이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나 5km는 마라톤이 아니라 걷기 대회입니다. 일부 참가자들 중에는 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사이에 시각장애자들과 보조요원 혹은 그의 가족들이 함께 걷기 때문에 뛰기도 불편합니다. 저는 달리는 것은 포기하고 걷기만 하기로 합니다. 5km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오늘의 숙제입니다.



숲 속으로 들어오니 풀냄새 흙냄새가 납니다. 나무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올림픽 공원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많은 숲의 공원입니다. 그 안에서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느긋해집니다. 들이쉬는 숨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아스팔트 길이 아니니 걷기도 좋습니다. 길바닥이 뜨겁지 않고, 숲 속의 시원한 공기가 길 위로 불어옵니다. 앞에서 60대 후반의 엄마와 30대 후반의 딸이 같이 걸어갑니다. 앞을 못 보는 장애인 엄마가 딸의 팔을 잡고 걷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60쯤 되어 보이는 남성 장애인이 젊은 안내자의 줄을 잡고 걷습니다. 그 옆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같이 걸어갑니다. 아마도 딸이거나 손녀일 것 같습니다. 같이 웃으며 걷는 것이 걸으면서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장애인들은 가족과 함께 참여하거나, 혼자 참여하여 대회본부 측에서 지원하는 봉사자의 도움을 받습니다.  


20대 안내인과 40대의 시각장애인이 함께 줄을 잡고 걷습니다. 안내인이 장애인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따라오시면 됩니다." "이제 앞에서 왼쪽으로 굽어집니다." 70대의 나이 많은 장애인도 있습니다. 그분도 혼자 참여했는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걷고 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어느덧 반환점에 도착했습니다. 힘들지 않으니 반환점이 그렇게 반갑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반환점이라고 물도 있습니다. 한잔을 마시고 반환점을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데 섞이게 되었습니다. 장애인 중에는 10km를 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장애인은 나이가 상당히 많이 들어 보이는데 10km를 뛰고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안내자도 있고 뒤에서 보조하는 사람들도 따라붙었습니다. 이렇게 도와주니, 시각장애인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대회입니다. 


걷다 보니 어렸을 때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나이 많은 형수님이 우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앞에 세탁소하는 삼촌 집에 형수님 좀 모셔다드려라."

"예!"


이렇게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형수님과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형수님은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걸으셨습니다. 형수님 눈이 잘 안 보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형수님을 따라갔습니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형수님이 묻습니다.

"아니 얘야 이렇게 머냐? 잘못 온 게 아니야?"

"예?"


형수님 손을 잡고 계속 따라갔던 저는 상황이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형수님 얼굴만 쳐다봤습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고 공중전화도 없으니 그 자리에서 뭔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말똥말똥 눈알만 굴리고 있던 저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시고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자!"


앞을 못 보는 형수님은 혼자서 삼촌집을 찾아갈 수 없으니 제가 앞장서서 삼촌집을 안내해야 하는데, 그런 형수님 손을 잡고 따라만 간 것입니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모이면 가끔 이일을 꺼내서 이야기했습니다. 저로서는 말귀를 못 알아먹었던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가족들은 재미있어했습니다. 그 형수님은 나중에 부엌에서 혼자서 불을 때다 집안에 불이 나, 오래된 한옥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형수님 가족이 수십 년을 살아오던 집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온 가족이 고생을 했습니다. 형수님은 그일로 오랫동안 자책감과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잘 보는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칼을 들고 있는 연산군(장진영)을 향해서 광대 장생(감우성)이 이렇게 외칩니다.

"날 쳐라. 나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놈이다."

이를 듣고 연산군이 비웃으며 말합니다.

"잃을 게 없어? 이 놈의 눈을 불로 지져라."


너무도 충격적인 이 장면이 생각납니다. 연산군은 어떻게 사람의 눈이 그렇게 중요한지 알았을까요? 그동안 세상을 잘 보던 사람이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다 잃는다는 뜻이 아닌지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은 잘 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만큼 눈이 가지는 중요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눈의 소중함을 잊고 지냅니다. 오늘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을 깨닫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덧 1km가 남았습니다. 기온은 28도, 체감온도는 31도입니다. 역시 내일부터 9월이니 여름의 무더위가 조금은 수그러들었습니다. 코스 길을 걷다가 백제학 연구소가 있는 것을 봤습니다. 오늘은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아주 넓은 공원의 일부만 보며 걷지만, 다음에는 시간을 내서 따로 둘러봐야겠습니다. 이곳에는 몽촌역사관과 한성백제박물관, 서울백제어린이 박물관 등이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홀로나무, 그리고 JYP엔터테인먼트 신사옥도 이 부근에 있다니 찾아가 봐서 기념사진을 찍고 역사관과 박물관을 둘러봐겠습니다. 





어느덧 멀리 골인 지점이 보입니다. 그런데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걸었으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골인하면서 보니, 지금까지 모두 52분 걸렸습니다. 중간중간에 멈춰 서서 사진도 찍고 경치도 구경하고 길고양이들 노는 모습도 보면서 걸었기 때문에 조금 지체되었지만 대략 1km 당 10분 꼴로 걸었습니다. 


골인선을 지나 광장 안으로 들어가니 긴 줄이 보입니다. 그 줄에 같이 서서 기다리다 메달과 함께 간식 봉지를 받았습니다. 메달은 사각형입니다. 메달에는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대회 심벌 마크와 함께 '제10회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라톤대회'라고 쓰여있습니다. 봉지 안에는 김치 볶음 컵밥, 선크림, 모기 기피제, 그리고 샤인머스캣 맛이 나는 비타민 젤리 1 봉지, 고단백 저지방 소시지 2개, 거기다 비치 타월 1장도 들어 있습니다. 참가비는 시각장애인 행사 기부금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회용 컵에 들어 있는 김치볶음밥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평화의 광장 바닥에 주저앉아 먹었는데 마라톤 대회 참석하고 밥을 얻어먹은 것은 처음입니다. 언젠가 컵라면을 받아먹은 적이 있는데, 역시 밥이 주는 만족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양은 많지 않고 일회용 컵이었지만,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데, 앞서서 60대 엄마와 30살쯤 돼 보이는 딸이 지하철 역사로 들어갑니다. 딸의 손에는 대회본부에서 준 비닐봉지 두 개가 들려 있습니다. 한 손은 엄마 손을 잡았습니다. 저는 이미 밥을 다 먹고 이렇게 길을 나섰지만 이 두 사람은 그 사이에 밥을 먹지 않고 체육복을 일상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밥과 간식은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인지 그냥 들고 갑니다. 앞이 안 보이니 이런 장소에서 먹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겠지요. 오늘 하루 의도치 않게 기부활동을 하고 뜻깊은 나들이가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여름이 끝날 즈음에, 기억했다가 또 참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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