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기가 방 안을 휘감고 있었다.
밤사이 세상이 얼어붙은 듯했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둔하게 욱신거렸다. 감기가 집요하게 그를 붙들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담요를 끌어당긴다. 눈을 감아보려 노력하지만 불편함에 부스럭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나섰다. 추위에 굴복한 바닥의 감촉은 몹시 쓰랴렸다.
"이게 뭐지..?"
분명 어젯밤엔 없던 냄비가 부엌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김과 함께 고소한 향이 퍼졌다. 전복죽이었다. 옆에는 접힌 쪽지가 함께 얹혀 있었다.
사랑하는 내 남편, 이거 먹고 힘내!
- 예쁜 다영이가.
문득 어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감기의 걸렸다는 말,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겼던 대화. 순간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아직 연인일 뿐이지만 다영은 유난히 ‘남편’이라는 애칭을 좋아했다.
"남편이라는 단어가 좋은거야, 아니면 내가 남편인 게 좋은 거야?"
농담처럼 던지면서 속에는 깊은 진심이 섞인 걸 느낄 수 있었다. 각박한 세상에 자신을 염려해 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 지후는 문득, 유난히도 자신이 복되게 느껴졌다.
“잘 먹을게 다영아.”
죽은 이미 식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 언제 이런 시간을 냈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전복은 큼지막했다. 국물은 깊었다. 원래 그에게 밥이란 단순히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허기가 채워져도 숟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어.. 언제 다 먹었지...?”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다. 이렇게 맛있게 음식을 먹은게 과연 얼마 만일까. 그는 혼자말처럼 되뇌었다.
“타이레놀이 있었는데... 어디다 뒀더라.”
집 안을 뒤적이다 보니 금세 방은 어수선해졌다. 손을 책장 아래로 뻗어본다. 구석에 밀려 있던 공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표지였다.
"이게 왜 여기있지..?"
유진과 사귀던 시절에 쓰던 일기장이었다.
"휴,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었다니.."
어릴 적 그는 글쓰기를 지독히 싫어했다. 단어들이 빼곡이 펼쳐진 페이지를 마주하면 숨이 막혔다. 공포가 스며들고 토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만큼은 부지런히 펜을 들었다. 함께한 기억이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어색한 문장으로, 서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적어 내려갔었다.
“민망하긴 한데, 이상하게 재밌네”
지후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일기장을 펼쳤다.
종이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 나왔다.
마치 이미 지나버린 계절의 온기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
<7월 21일 : 복도>
학교 복도는 끝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멀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오늘 어디가?”
내가 물으면 유진은 늘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미술실.”
“매일 가네.”
“안 가면 어색해.”
그 말의 의미를 깊이 묻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가슴 안에 쥔 스케치북 하나가 눈에 밟혔다.
왜인지 하루의 균형을 지켜주는 사람처럼 보였다.
확성기처럼 떠드는 아이들 속, 우리는 딴 세상에 있는 듯했다.
“복도 진짜 시끄럽다.”
내가 말하자 유진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더 빨리 지나가고 싶어.”
“어디로?”
“미술실.”
쏟아져 나오는 애들 사이, 나는 자주 유진과 보조를 맞춰 걸었다.
처음에는 우연 같았지만, 돌아보니 그 우연이 너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8월 3일 : 쉬는시간>
비 오는 날의 교실은 무거웠다.
타닥타닥 창을 노크하는 빗소리만이 안의 적막을 채웠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쉼 없이 변주하는 글자의 속도가 좋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생각이 정돈됐다.
옆자리에서 연필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웠다 그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뭐 그리고 있어?”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그리고 있어.”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 종이를 봤다. 선은 많았지만, 아직 형태는 없었다.
“언제 완성돼?”
유진이 웃었다.
“글쎄, 안 돼도 상관없어. 그리는 동안은 재밌잖아.”
나에게는 낯선 말이었다.
“난 끝이 안 보이면 집중이 잘 안 돼.”
“그래서 책 읽는 거야?”
“응, 천천히 따라가면 되니까. 앞으로만 가면 되고, 다시 돌아가도 괜찮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종이를 봤다.
“난 그런 게 답답해. 지금 기분이 바뀌면 그림도 같이 바뀌어야 하거든.”
연필이 다시 움직였다.
조금 전과는 다른 선이 그어졌다.
나는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너는 왜 그림이 좋아?”
내가 물었다.
“말 안 해도 되잖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이 짧은 차이를 압축본처럼 떠올렸다. 흡사 한 컷의 일러스트처럼.
책은 끝까지 읽어야 알 수 있지만 그림은 보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는 걸.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9월 4일 : 자습실>
중간고사 기간의 자습실은, 이상할 정도로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곳이다.
누군가 뒤적이는 책장 소리, 형광펜이 종이 위를 긋는 미세한 마찰음, 창밖에서 들려온 축구공 튀는 소리가 이곳이 살아 있는 공간임을 알려 주었다.
나는 맨 뒤 자리, 창가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창문에 가장 가까운 자리가 유진의 자리였다.
각자의 공책에 다른 문제를 풀고, 다른 밑줄을 긋고 있었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칸막이 책상에, 같은 굽힘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면, 유진의 옆얼굴이 보였다.
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속눈썹, 볼펜을 쥔 손가락의 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났을 때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습관 같은 것들.
그 모든 사소한 움직임이, 기억 속에서 하나의 ‘정지된 그림’으로 응결되었다.
그녀는 이런 시간을 그냥 ‘공부시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시간은 이름이 달랐다.
그것을 사랑의 한 형태라고 믿고 싶다.
<10월 30일 : 고백>
시험이 끝난 날, 자습실 불이 하나둘 꺼졌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의 복도는 이상하게 비어 있었다.
“끝났다.”
유진이 먼저 말했다.
“끝났네.”
“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해도 되지?”
“그래도 돼?”
우리는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계단 앞에서 유진이 갑자기 멈춰 섰다.
“지후야.”
“응?”
“너…”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나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다.
“불편하면 이렇게까지 안 왔을 것 같은데.”
“어디까지?”
“여기까지.”
유진이 잠시 나를 보다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럼…”
유진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고백이었는지 확인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오늘부터 1일’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계단을 내려가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았다.
손이 닿았을 때,
아
이게 시작이구나. 하고 알았다.
<11월 6일 : 하교길>
사귄 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복도를 함께 걷고,
매점에 가고,
자습실에 나란히 앉았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의 속도를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다는 것.
“오늘 미술실 갈 거야?”
“응. 근데 천천히 갈려고.”
“왜?”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이런 말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주고받게 되었다.
“넌 왜 맨날 뒤에 걸어?”
“앞에 있으면 네 얼굴 못 보잖아.”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너한테.”
우리는 웃었고,
그 웃음은
이제 숨기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11월 18일 : 이해>
다시, 비 오는 날이었다.
교실에는 우리 둘만이 남아있다.
나는 책을, 유진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제는 서로의 선택이 낯설지 않았다.
“아직 그 책 읽어?”
유진이 물었다.
“응. 거의 끝이야.”
“끝이 보이면 좋아?”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장이 있다는 게 좋지. 거기까지 가면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
유진은 스케치북을 펼치며 말했다.
“난 끝이 정해져 있으면 손이 잘 안 가. 그리다 보면 자꾸 바뀌거든.”
연필이 종이 위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근데 말이야. 네가 책 읽는 거, 이제는 좀 알 것 같아.”
“뭐가?”
“천천히 가도 된다는 거. 뒤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일단 넘기면 된다는 거.”
나는 웃으며 책 표지를 쓰다듬었다.
“나도.”
“네 그림이 왜 좋은지 조금은 알 것 같지도?”
“어떻게?”
“지금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완성 안 돼도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잖아.”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네 쪽도 이해해보고 싶어.”
사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은 서로를 바꾸려는게 아니라,
서로의 선택지를 하나씩 들여다봐야 한다는걸.
<12월 2일 : 뽀뽀>
자습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유진은 졸린지 자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작은 종이를 밀어주었다.
‘졸면 혼남.’
유진이 그걸 보고 웃으며 답장을 썼다.
‘그럼 깨워줘.’
나는 책상 아래에서
유진의 손등을 입술로 살짝 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이렇게?”
“응. 딱 그 정도.”
아무 일도 아닌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마 사랑이란,
이렇게 별일 아닌 장면들로
조금씩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12월 24일 : 기록>
사귀고 나서 일기를 쓰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를 적었다면,
지금은
이 사람과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를 적는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유진은 여전히 그림을 좋아하고
나도 책만을 읽는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같은 방향을 보고 걷고 있다.
이 일기들이
언젠가 다시 읽힐 때,
나는 이 페이지들을
가장 애틋하게 넘기게 될 것 같다.
사랑이 시작되었고,
영원할거라 믿는다.
이미 지나간 하루인데, 그날의 공기는 여전히 페이지 위에 남아 손끝을 적셨다. 지후는 그 시절의 자신을 소설 속 인물처럼 바라본다.
" 참 귀여웠네, 이때."
좋아하는 이름을 몇 번이고 적었다 지웠다. 눈을 마주친 날을 서사처럼 기록해 두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일어서던 마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웃음이 나올 만큼 서둘고 과장된 문장이다. 하지만 그때의 지후는 세상의 전부를 걸고 사랑을 연습하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부끄러움 보다 애틋함이 먼저 밀려온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더 진심이었고, 상처받는 법을 몰랐기에 더 용감했다.
"마지막 날은 뭐라 썼더라?"
-띠리리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도어록 소리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나왔어."
지후는 반사적으로 일기장을 덮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생각을 급히 숨기듯, 책장을 밀어 넣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다영은 현관에서 코트를 벗으며 집 안을 한 번 훝어봤다. 테이블 위에 냄비를 발견하고 크게 웃었다,
“어? 다 먹었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와 빈 그릇을 들여다봤다.
“급하게 만든 거라 걱정했는데.. 맛 괜찮았어?”
“응 맛있었어.”
지후의 대답은 짧았지만 진심이었다. 그 말에 다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웃었다. 그런 칭찬쯤은 늘 받아왔다는 사람처럼.
“다행이다.”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나 씻고 올게.”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그제야 지후는 숨을 고르듯 소파에 엎어졌다.
"근데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다시 책장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이번엔 숨기지 않고 일기장을 꺼냈다. 마지막 페이지는 그대로였다.
시간이 멈춘 듯, 과거가 얇은 종이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 1월 13일 : 마지막 >
오늘은 네 생일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으면서 축하해 줘야 할 날에, 너는 나에게 먼저 이별을 말했다. 축하 인사보다 헤어지자는 말이 먼저 남을 줄은 몰랐다.
너는 내 첫사랑이었다. 나는 정말 널 사랑했다. 서툴렀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생일에 이런 마음을 남기는 내가 미안하지만 그래도 진심이었다. 언젠가 내가 더 성장해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면 다시 너를 찾으러 가고 싶다.
오늘은 네 생일이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너를 좋아한다.
지후는 한동안 종이 위를 바라보다가, 다시 덮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책장에 넣지 않았다. 회사 가방을 열어, 맨 안쪽에 일기장을 밀어 넣었다. 서류들 사이에 끼워 넣으며 그는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그냥 가지고 가자."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는 여전히 이 집에 있었다.
그러나 지후는 이미,
조금 전부터 다른 시간을 함께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