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남긴 자리

by 태화

마음 한켠에 작은 밤이 뜬다.


수많은 별과 은하, 부서진 빛들이 새겨진 어둠이다. 별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와 온기, 색을 지닌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있다. 흔들리는 세상 속 발 디딜 곳 잃을 때 손길이 되어주는 빛. 해방이라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던가. 언젠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었다.


별 하나가 춤을 추듯 흩어진다. 밤 속으로 스며든다. 그 별을 따라 걷는다. 길을 잃고, 오래 헤맨다. 그제야 깨닫는다. 너는 사라졌다. 다시는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걷는다.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따뜻했던 너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


-째깍 -째깍


밤이 되었다. 초침 소리마저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냉혹하고 무정한 밤이다. 지후는 나른해진 몸을 침대에 눕힌다. 벽시계를 보니 11시 48분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지울 시간이다. 그는 눈을 감는다.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지길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은 언제나 의도와 달리 움직인다. 복도와 운동장, 자습실과 미술실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 생각은 지후의 맘대로 꺼지지 않았다. 끝없이 회전하는 초침처럼 원에 갇혀 그녀가 쉼 없이 그려졌다.


기억은 항상 사후에 완성된다. 그날의 말투와 걸음 속도, 눈빛의 길이는 상상해온 것과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더는 확인할 길은 부재하다. 지금 떠올리는 이 장면이 기억인지, 형상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추억은 기억이 된다. 사랑을 재단하여 살이 된다. 마치 규레이션된 전시처럼 지후의 머릿속 벽에 걸려 있다.


-위이잉


책상 위에 엎어둔 휴대전화가 떨렸다. 집어 드니 화면에는 ‘유다영’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지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이 멎자 짧은 알림이 남아 있었다.


[오늘 회식, 많이 늦어?]


그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다영과 주고받는 메시지는 대체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몇 시에 끝나’, ‘이거 먹을래’, ‘지하철 타?’ 같은 문장들. 과장된 고백도, 괄호 속에 숨겨진 설렘도 없었다. 오로지 하루를 이어가는 위한 말들이었다. 지후는 오늘따라 유난히 다영의 한 줄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제 가. 많이 안 늦을 듯]


간단한 답장 뒤에,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해진다. 두 사람은 회사를 통해 만났다. 같은 부서에 있었고,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삶의 속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의 일정과 급여 체계를 알고 있었고,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생활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 이야기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미래를 상상할 때 사랑보다 안정이 먼저 떠올랐다. 다영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지금의 지후를 기준으로 앞으로의 다영을 이야기했다.


지후는 그럴수록 유진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시절,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서로를 바라보던 사람. 유진과의 시간에는 조건도, 계산도 없었다. 대신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는 진심이 있었다. 지후는 다영과 함께 있을 때 잘 사는 법을 고민했고, 유진을 떠올릴 때 사랑하는 법을 먼저 떠올렸다.


유진은 과거였고, 다영은 현재였다. 그리고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를 눌러 두고 있었다. 그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독촉하면서.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시간표를 잘 지키지 않는다. 지금 결혼을 이야기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도, 이미 끝나버린 첫사랑이 왜 아직도 자신 안에 남아 있는지 뇌까린다.


“미쳤지, 미쳤지, 내가.”


첫사랑의 말은 과대 해석하면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말과 시간은 습관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선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웠다. 콘크리트 벽에는 오래된 물자국이 층층이 쌓였다. 지후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괜히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이 순간이 어떤 문장으로 남게 될까. 은연중에 생각이 스치다 이내 사라졌다. 지금의 그는 그저 조금 늦은 퇴근길에 오른 사람이었다. 오늘 하루가 잘 풀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 사실을 하나하나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계단 끝이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눅눅해졌다. 주차장 바닥에 내려서자 차가운 타일의 감촉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지후는 걸음을 늦췄다. 어디선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그때, 다영과의 첫 만남이 번뜩였다.


야근이 끝난 늦은 저녁, 주차장 앞에서 나란히 마주친 다영. 그녀는 간결히 웃으며 말했다.


“택시 같이 타실래요? 집 방향 같으니까.”


다영은 조건이 맞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비슷한 연봉, 공통의 취미, 심지어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까지. 우연이라기엔 정돈된 일치였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매끄럽게 흘렀지만, 온도는 일정했다. 감정이 튀어 오르기보다 정보가 차분히 오갔다. 출근 시간, 주말의 루틴, 재테크 방식, 부모님과의 거리 같은 것들. 서로의 생활 패턴과 미래 계획을 빠르게 공유하며, 이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은근히 가늠하는 듯했다.


함께 있어 불편함은 없었고, 예상 밖의 순간도 없었다. 웃음은 정해진 박자에 맞춰 나왔고, 침묵마저도 준비된 여백처럼 느껴졌다. 다영과의 관계는 감정이 쌓이기보다 조건이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였다. 잘 설계된 도면 위에서 조립되는 피사체. 안정적이고 효율적이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공간처럼. 다영과의 관계는 맞춤형 설계 같았다.


“자 다들 수고했고, 앞으로도 힘내 봅시다! 건배!”


회식은 이미 소음과 웃음으로 꽉 차 있었다. 팀장, 선후배들이 뒤섞여 앉았고, 긴 탁자 끝자리에 다영이 있었다. 지후가 들어서자, 다영이 손을 흔들었다.


“어 남편 왔어!”


다영의 목소리는 크고 선명했다. 조용한 미술실의 유진과는 다른 결의 목소리. 두 시절의 소리가 겹치자 지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늦어서 미안.”


“괜찮아. 아직 먹은지 얼마 안됐어.”


둘의 대화는 겉으로는 평범할지라도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마치 마음의 초점이 절반쯤 과거에 맞춰 있어, 현재의 얼굴이 흐릿해 보이는 것처럼.


지후가 자리에 앉자, 팀장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지후 씨 왜이리 늦었어! 드디어 둘이 결혼한다며, 축하해야지!”


주변 동료들도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축하해요, 우리 부서 1호 결혼 커플이네요!”


“드디어 오피스 커플에서 결혼 커플로 승격!”


다영은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호호호 고마워요.”


지후는 멈칫, 억지 웃음을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술자리는 빠르게 소란스러워졌다. 작가 섭외 이야기, 마감 지연, 갑질 회사, 출판 시장 침체 같은 대화들이 오고갔다. 지후는 적당히 웃고, 맞장구를 치고, 잔을 비웠다. 회식은 무난히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팀장이 꺼낸 한마디가 공기의 방향을 틀었다.


“아, 다음 프로젝트 프리랜서 작가 섭외 건 말인데.”


팀장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예전에 얘기했던 그 일러스트레이터, 섭외 거의 확정이야. 이름이… 정유진이였나?”


익숙한 이름에 지후의 손이 잔을 쥔 채 멈췄다. 잔 속 맥주 거품이 가라앉자 팀장님이 말을 이었다.


“지후 씨가 담당해서 해보는 건 어떨까?”


팀장님의 말에, 다영의 눈빛이 옮겨갔다.


“아.. 혹시 포트폴리오 볼 수 있을까요?”


지후의 대답은 반 박자 늦었다. 파일을 여니 익숙한 그림체가 보였다.


“한 번 잘해봐, 지후씨는 뭐 알아서 잘하니까.”


팀장님의 웃음소리에 그도 자연스레 웃으려 노력했다. 어쩐지 어색하기도 했다.


“축하해 지후씨.”


다영의 호칭이 귀에 걸렸지만 반사적으로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회식이 끝난 식당 앞은 사람 소리로 북적였다.


“유대리 2차 같이 가야지!”


“팀장님 저는 오늘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장님 2차 가실 건가요?”


사람들은 각자의 장소로 흩어졌다. 신호등이 한 번 바뀌자 지후와 다영만이 같은 자리에 남았다. 늦은 밤의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연말 거리의 네온사인은 필요 이상으로 밝아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 있었다, 밤공기가 비어 있는 마음속을 투영하는 듯 했다.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언가 지나가 버린 기분이 들었다. 지후는 무슨 감정인지 끝내 짚어내지 못한 채, 손끝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까 그 작가님”


다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알던 사람이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손끝이 떨렸다. 적당한 대답을 찾아본다. 그러나 막상 입술 앞까지 오자, 전부 낡은 종이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결국 그가 내놓은 건, 사실 중에서도 가장 얇은 층이었다.


“아.”


다영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름과 반, 그 이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걸 직감하는 소리였다.


“친했어?”

질문의 방향은 직설적이지만, 목소리는 최대한 평평했다. 감정을 섞지 않으려는 노력처럼 들렸다. 지후는 고민했다. 그 시간들을 ‘친하다’라는 한 단어로 묶어도 되는지, 아니면 더 무거운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그냥… 이것저것 같이 하던 애.”

이윽고 그의 대답은 안전한 언어였다. 가장 많은 것을 숨기면서도, 거짓말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표현. 다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냥?”


한 단어가, 지후의 발을 붙잡았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다영의 표정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했다.


“지후야.”

또다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분명한 건 그 속에는 꽤 오래 쌓인 무언가 있었다.

“나한텐… 굳이 ‘그냥’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데.”


지후는 반사적으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면 뭐야?”

다영이 말을 끊었다.

“너 요즘 좀 달라진 거 같아. 내가 뭐 얘기만 하면 예전처럼 받아주지도 않고, 대답도 항상 짧잖아. 괜히 내가 말 걸고 있는 사람 된 기분 들 때도 있고. 연락도 마찬가지야. 전에는 별일 없어도 한 번쯤은 먼저 했는데, 요즘은 내가 안 하면 그냥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더라. 바쁜 건 알겠는데… 그걸로 다 설명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지후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같은 반이었고, 이것저것 같이 했고… 근데 그 사람이란 말이 나왔을 때, 너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밝은 거리 아래 둘 사이의 공기만 어두워진 것 같았다.


“너가 말했잖아.”

다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누구든 처음 만났던 사람, 첫사랑 같은 거… 그런 건 그냥 추억으로 남는다고. 현실이랑은 다르다고.”


언젠가 술김에, 혹은 대화의 맥락 속에서, 지후가 먼저 했던 말.


‘첫사랑은 그냥 첫 기억일 뿐이야. 현실의 사랑이랑은 별개지.’


그때의 다영은 안도한 듯 웃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다영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가까이 서 있으니 회식 자리에서 마신 술 냄새가 아직 진했다. 그 잔향이 둘 사이 남은 말까지 대신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영이 말했다.

“네가 그 말을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회사 건물 앞 인도는 이미 한산했다. 거센 겨울바람의 현수막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어디선가 붙였다가 미처 떼지 못한 축하 문구들이 밤공기 속에서 의미를 잃고 있었다.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


“요즘 결혼 준비도 하고, 그거 때문에 신경쓰는 것도 많아서 좀 날카로워진 걸 수도 있어.”


다영은 끝내 지후를 보지 않았다.


“근데 네가 갑자기 옛날 얘기 꺼낼 때 있잖아.”


"...."


“그냥 농담처럼 말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모르겠어.”


지후는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고개는 자꾸만 떨어졌다.


“옛날 얘기야 누구나 하지. 근데 너는 항상 말 끝이 좀 달라.”


지후는 그제야 그녀를 보았다.


“나랑 얘기하는 거랑 다르게, 그 애 얘기할 때면 행복해보여.”


다영은 잠깐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항상 조금 조심스러워져. 좋았다고도 안 하고, 별거 아니었다고도 안 하고.”


"....."


“마치 아직 정리 중인 것처럼.”


부정하려면 너무 많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고, 인정하기엔 너무 빠른 자리였다.


“나”


다영이 결심한 듯 말했다.


“확인받고 싶은 거 아니야.”


다영은 처음으로 지후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덧붙였다.


“다만 궁금한 건 그거야.”


지후의 숨이 얕아졌다.


“네가 아직도 그때의 마음을 기준으로 지금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신이 아닌, 추측의 형태였다.


“나는 너랑 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고 집 얘기, 돈 얘기, 함께 할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녀는 잠깐 웃었다. 씁쓸하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 웃음.


“가끔은 네가 나랑 있으면 현재로 돌아오고, 혼자 있으면 과거로 가는 사람 같아.”


지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영은 재촉하지 않았다.


“지후야 나한테 확신을 달라는게 아니야.”


다영의 눈이 떠 또렷이 지후를 응시했다.


“네 마음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만 알고 싶어.”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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