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는 한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속에서 굴리던 변명과 설명은 다영의 눈빛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동안 과거를 해석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준비해둔 그럴듯한 말들은, 지금 눈앞의 감정을 책임지기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미안해.”
결국 그가 내뱉은 건, 가장 짧고 빈약한 단어였다. 다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뒤에 뭐가 붙느냐에 따라, 오늘이 그냥 싸움으로 끝날지, 아니면… 우리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지 정해질 것 같아.”
지후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단순한 질투나 오해의 장면이 아닌, 자신이 그동안 신봉해 온 ‘완벽한 사랑의 기준’이 처음으로 현실 앞에 흔들리는 순간이라는 것을.
“사실, 한동안 마음 한켠에 붙들고 있던 사람이 있어.”
다영은 놀란 듯 숨을 삼켰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
“이번에 같이 협업하게 된 정 작가님..”
”그래보였어.“
”나한텐...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이였어.“
지후의 낮은 목소리 뒤에 묵직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사람과는… 아무 조건 없이, 오직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만 만났어. 설렘도, 실수도, 모든 게 단순하고 솔직했지. 그런데 너와 함께 있을 때는… 계획과 조건을 먼저 보고, 사랑은 뒤로 밀리는 느낌이야.”
다영은 말을 헛디뎠다.
“그러니까… 뭐? 그 사람 때문에 나를 비교했던 거야?”
지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응. 그런 셈이야.”
작은 한마디는 이미 둘에게 충분히 무거웠다. 겨울 공기가 빈틈을 파고들고, 가로등 불빛이 인도 위에 얼룩처럼 번졌다. 둘 사이에는 서늘한 선이 그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준 건… 고맙네.”
다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분은 더럽게 나쁘지만.”
다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과거에 머물 거야, 아니면 나랑 현실을 마주할 거야?”
지후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내가 붙들고 있던 건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었는지 아닌지..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사랑,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사랑,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은 사람한테서 나올 수 없잖아.”
다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지후를 바라봤다.
“그래도, 난 네가 사람이어서 좋았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실수도 하고, 눈치 없을 때도 있고, 때론 나보다 자기를 더 이해하는 척할 때도 있고. 그런데 그게 다 사람이잖아. 불완전해서 좋았어. 같이 맞춰 가는 맛이 있으니까.”
지후는 숨을 멈췄다. 확신할 수 없지만 사랑이란 개념을 정의해본다.
사랑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같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네 안에는 아직 끝난 사랑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다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는 그 사랑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냥 지금 우리만으로 충분했으면 해.”
“어떤 맘일지 이해해.”
지후는 힘겹게 말했다.
“그래도, 노력할게. 비교하는 습관, 조금씩 없애고, 지금 있는 것만 보려고.”
다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노력이어야 한다는 게 조금 슬프지 않아? 나랑 있을 때 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고요는 길게 흘렀다.
이 간극은 과거의 ‘함께 버티는 느낌’이 아니라, ‘각자 제자리에서 멈춘 느낌’이었다.
한참 후, 다영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결론 내리지 말자.”
“.....”
“나도 지금 내가 화가 난 건지. 실망한 건지, 그냥 지친 건지 잘 모르겠어.”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
다영은 시선을 피했다.
“네가 진짜로 뭘 놓을 수 있고, 뭘 못 놓는지 잘 생각해줘. 난 그 답을 듣고 싶어.”
둘은 서로를 등지고 걸었다. 일부러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처럼, 서로의 거리는 다시는 닿지 않을 것처럼 멀어졌다.
다영은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다시 지후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등판에 무언가를 움켜쥔 채, 팍 하고 내리쳤다. 지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반지 케이스였다.
“나, 프로포즈하려고 했는데.”
다영이 말했다.
“다 망쳤네.”
“반지는 네 마음대로 해.”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은 채, 거기 머물러 있었다.
“아니면,”
다영이 덧붙였다.
“생각 정리되면, 네가 나한테 프로포즈 하든가.”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지후는 거실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은 소음처럼 뒤엉켰다. 고요한 방안과 달리 지후의 마음속은 폭풍이었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소파 위로 던졌다. 문자를 보내고 싶은 충동은 목을 옥죄듯 밀려왔다.
책상 위 소설책, 캔버스 위 스민 물감, 시린 겨울 공기, 사진 속 미소…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그의 뇌를 압박했다. 어떤 것을 붙들고, 어떤 것을 흘려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장면들은 다시 재편집되고, 그 속에서 현실과 이상, 사랑과 조건이 뒤엉킨 채 불쑥 튀어나왔다.
‘이데아 첫사랑’이라 이름 붙인 소설이 떠올랐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기억 속에서 만든 완벽한 그림자.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다영의 존재, 살아있는 숨결과 불완전함도 동시에 느껴졌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의 내면은 극도로 흔들렸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한쪽으로 기울면 금세 뒤집힐 것만 같았다.
손이 일기장 쪽으로 갔다 멈췄다. 글을 꺼내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지금의 불편함을 그대로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잠시 맞섰다. 대신 그는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여니 반지가 있었다. 고운 반짝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얹혀 있었다. 편지였다.
*
남편에게,
이 반지를 건네는 이 순간을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수없이 그려왔어. 막상 글로 쓰려니,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사랑이 이렇게까지 단단해질 수 있는 감정인지 몰랐어. 설렘은 금방 사라지고, 약속은 쉽게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온도로 나를 바라봐 줬어.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큰 행동이 없어도, 네 존재만으로 내가 얼마나 안전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줬어.
힘들 때는 조용히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기쁠 때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웃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선택해 줘서 정말 고마워. 완벽하지 않은 나를, 좋은 날뿐 아니라 서툰 날까지도 함께 품어줘서.
나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평범한 하루들을 쌓아가고 싶어. 별일 없는 날의 저녁, 사소한 말다툼, 금방 웃고 마는 화해,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기쁠 때는 두 배로 기뻐하고, 힘들 때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않게 해줄게.
지후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고,
내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도 너야.
이 반지는 약속이야.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아주 먼 훗날까지
너의 편으로, 너의 가족으로, 너의 사랑으로 살겠다는 약속.
나와 결혼해 줄래?
너를 사랑하는
다영이가
*
다영은 이걸 어떤 마음으로 넣어두었을까. 반지를 하나씩 손끝으로 돌려보며 빛을 살폈다. 살짝 스친 손끝에도 마음이 떨리는 것 같았다. 케이스를 닫는 순간, 작은 쇳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종이를 접으며 손가락 끝이 살짝 굳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눈, 끝내 꺼내지 않은 말들. 그 순간들이 편지의 문장 사이사이에 겹쳐, 종이 틈마다 숨 쉬듯 스며들었다.
지후는 편지를 접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마음을 관통했다. 머릿속은 지독하게 혼란스러웠다. 과거에 남아 있는 ‘이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현실 속 ‘사랑’은 등 뒤에서 손을 내밀며 흔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생각들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며, 숨을 쉬듯 그의 가슴을 스쳤다.
지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들려오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와 손끝의 떨림이 겹쳤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떨림 속에서,
그는 이제야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