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얼굴이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는 빈칸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상대를 만난 것처럼 떨고 있었다. 공간과 시간은 어느새 지척에 와있다. 눈을 감으면 과거와 현재가 겹쳐, 오래된 설렘과 연약한 긴장으로 채워졌다. 여백 속에서 자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는 숨을 고른다.
*
미팅 당일, 지후는 회사 근처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유난히 긴장해 보였다. 출근 시간대가 막 지난 거리에는 사람의 물결이 남아 있었다. 신호등 앞에 멈춘 차들 사이로 커피 머신이 김을 뿜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손목시계는 약속 시간까지 정확히 5분을 남기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길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여성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코트, 한쪽 어깨에 무심하게 걸친 가방, 급할 것 없는 느슨한 걸음. 지후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슴 언저리가 아주 약하게, 그러나 분명히 간질거렸다.
“한지후!”
그 감각은 설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오래된 것이었고, 반가움이라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었다. 마치 오래 닫아 두었던 서랍을 무심코 열었을 때, 먼지 냄새와 함께 튀어나오는 기억의 파편 같았다.
“진짜 오랜만이네,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너도. 아니,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프리랜서의 비애지. 제때 못 먹어.”
유진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다가왔다. 웃을 때 생기는 눈꼬리의 주름, 인사를 대신해 자연스럽게 내미는 손. 악수를 하는 순간, 손끝으로 전해진 온기가 지후를 잠시 다른 시간으로 데려갔다. 미술실 창문으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날, 서로 이름을 처음 불렀던 순간 같은 것들.
“와, 여기 사람 왜 이렇게 많아?”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그래. 평소에는 자리 없을 때도 많아.”
“그래도 이런 데서 일 얘기하니까 좀 그럴듯하네.”
지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안정적이었지만, 속에서는 박자가 어긋난 심장 소리가 메아리 쳤다. 유진의 말투, 미소의 각도, 커피를 주문하며 컵을 잡는 손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기억 속의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이 현실 위에 겹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넌 아직도 표정이 딱딱하네. 회사 다니면 다 그래?”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지후도 웃었다.
“너야말로 여유 있어 보인다. 프리랜서는 다르네.”
유진이 잠시 화장실에 가는 동안, 지후는 계속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숨은 괜찮은지, 얼굴이 지나치게 붉어지지는 않았는지. 이건 단순한 반가움 이상의 감정이었다. 이유를 설명하려 들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종류의 끌림.
유진이 포트폴리오를 펼쳤다. 도시의 윤곽 위로 얹힌 감정의 선들, 일부러 거칠게 남겨둔 색의 흔적들. 지후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신이 다시 유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세계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었고, 묘하게 사람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이 장면… 좋다.”
지후는 한 그림 위에 시선을 멈추고 말했다.
“원고 분위기랑 잘 맞아. 표지 후보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지후는 말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유진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취향이잖아. 예전부터 이런 거 좋아했으니까.”
‘예전.’
그 한 단어에 지후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습실의 침묵, 매점에서 나눴던 쓸모없는 대화, 복도를 나란히 걷던 오후의 길이. 그 모든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현재와 이어져서, 어디에 서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스케줄 이야기는 예상보다 빠르게 정리됐다.
“15일 마감, 초안 다섯 컷 가능할까?”
“14일까지 보내줄게. 문제없어.”
유진의 태도는 깔끔했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도 않았다. 지후는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성숙해진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여전히 가슴이 뛰는 걸까.
커피가 절반쯤 비었을 때,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사실 담당자가 너라는 거 듣고 깜짝 놀랐어. 아직도 출판 쪽에 계속 있는 것도 신기하고. 너 고딩 때도 맨날 책 얘기만 했잖아.”
“그땐 책 읽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
“아니야. 넌 처음부터 빠져 있었어. 반 애들 체육 시간에 축구 할 때 혼자 도서관 가던 애가.”
“그 얘긴 하지마.”
지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멋있었지. 그래서 더 기억나.”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후는 괜히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추억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
“회사 생활은 어때?”
유진이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그러지 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원래 조직이랑 잘 안 맞잖아.”
“너는 잘 맞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난 애초에 안 들어갔지.”
별거 아닌 티키타카에 둘 다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겹쳤다. 올라간 입꼬리가 가라앉은 뒤에도 대화는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여백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같았다.
“요즘도 쉴 때 그림만 그려?”
지후가 물었다.
“아니 작업하고, 일 없을 땐 집에서 뒹굴고. 넷플리스 보고.”
“뭐 보는데?”
“다큐? 그리고 범죄물.”
“의외다.”
“네가 더 의외야. 아직도 책만 보지?”
“요즘은 체력 떨어져서 넷플릭스도 봐.”
유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지후가 넷플을 본다고? 세상 변했네.”
지후가 웃었다.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조여왔다. 이런 쓸모없는 대화들이 왜 이렇게 좋을까. 왜 이렇게 쉽게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까.
“연애는?”
유진이 장난처럼 물었다. 지후는 다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달랐다.
“없어, 그냥 일만 하지.”
말이 공기 중에 떨어지는 순간, 지후는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진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게 갑자기 버거워졌다.
“너답다.”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
“항상 책이랑만 사귀는 타입.”
그 웃음에 지후는 또 한 번 흔들렸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그림자를 보며 진실을 상상하던 그 감정처럼.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설렘이, 완벽한 기억 속의 이데아를 향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눈앞의 현실적인 유진을 향한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미팅은 끝났다. 서명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유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고마워. 괜히 긴장했네.”
“뭘 긴장해.”
“너랑 일 얘기하는거.”
카페를 나서며 유진이 말했다.
“프로젝트도 그렇고... 그냥, 다시 봐서 좋았어.”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초안 기대할게.”
카페 문을 나서며, 지후는 유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설렘과 안도, 그리고 그 뒤에 조용히 웅크린 혼란.
이데아였을까. 미련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감정이었을까.
서랍 속에 넣어둔 사진이, 그날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위이잉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짧게 떨렸다. 지후는 화면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손을 뻗었다. 다영이었다.
‘오늘 미팅 어땠어?‘
짧은 문장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는 말. 지후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답장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띄웠지만, 커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기보다, 어떤 말도 지금의 상태를 정확히 정의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후는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의 여백이, 갑자기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손끝에 남아 있던 커피의 온기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그 이유를 굳이 단정하지 않을려 힘썼다.
글자는 여전히 입력되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