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꿈을 꾼다.
학교 복도는 뿌옇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교복을 입고 있는 유진은 늘 그렇듯 교실 맨 뒷자리에서 창틀에 걸터앉아 연필을 눌리고 있었다.
“뭐해?”
내가 슬그머니 다가가자 유진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스케치북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비밀이야. 이건 나중에 내가 터지기 일보 직전에만 보여줄 거거든.”
“치, 보여달라고 사정한 적 없거든요?”
“거짓말하네. 너 방금 고개 이만큼 뺐거든? 아무튼 이건 내 비밀이야.”
유진은 연필 가루가 잔뜩 묻은 손으로 지후의 콧등을 툭 쳤다. 서늘하면서도 까슬한 감촉에 간지러워 지후는 바보처럼 웃었다. 햇살은 유진의 교복 어깨 위로 금가루처럼 부서졌다.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선이 유진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지후의 심장으로 수렴되었다.
장면은 컷 편지처럼 바뀌어 어느 낡은 단관 극장의 좌석으로 흘러들었다. 흑백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비 내리는 거리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은 지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저 아저씨 뒷모습 좀 봐. 이상하지 않아? 슬픈 것 같은데, 그냥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어 있다고?”
“응 나 나중에는 저런 그림 그릴거야. 꽉 채우는 건 누구나 다 하잖아. 근데 저렇게 잘 비워두는 건 진자 아무나 못 하는 거거든. 진짜 멋있지 않아?”
유진의 목소리에 배인 습기와 영감은 지후의 마음 속을 생경하고도 선명한 결을 만들었다. 이전에 볼 수 없던 시선의 높이가 흥미를 채웠다. 사면의 이면을 훑는 일은 단순히 창의적이라거나 독창적이라는 마로 다 담아낼 수 없다. 틀을 다시 써 내려가는 그녀만의 고유한 문법이었다. 유진과 함께라면 세상의 비루한 풍경도 완벽한 한 편의 미장센으로 치환되었다.
-삐삑 -삐삑
알람소리에 잠을 깨어 눈을 떴다. 꿈의 부력은 중력에 밀려 빠르게 가라앉았다. 방문 사이로는 황소바람이 새어 나왔다.
“.....”
유진과의 만남은 계속됐다. 업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실질은 변질된지 오래였다. 일이라는 건조한 껍데기는 바스라졌고 영화라는 부드러운 알맹이만 남았다. 영화 한 편을 보면 각자의 생각을 툭툭 징검다리 놓았다. 하지만 굳이 다리를 건너 상대의 진심에 가 닿으려 애쓰지는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는 채로, 해석되지 않는 표정은 모호한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억지로 매듭짓지 않아도 혹은 완벽히 정리하지 않아도 흩어지지 않는 이 관계는 지후가 다영에게서 느끼지 못한 기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토록 간절했던 숨구멍의 이면에는 다영과의 침잠이 웅크리고 있었다. 유진과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다영에게 점점 말을 아끼게 되었다. 밖에서 가슴 펴 들이킨 신선한 공기가 안방의 문턱을 넘으면 건조해졌다. 일상을 지탱하던 문장들은 ‘그렇지 뭐.’, ‘나중에 얘기해.’ 같은 짧고 매끄러운 대체되었다. 숨을 쉬기 위해 만든 구멍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질식시키는 통로가 되고 있었다. 다영은 신뢰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받아들였고, 지후는 아슬아슬한 믿음의 지표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비좁은 영화관 입구에서 유진이 팝몬 상자를 흔들며 물었다.
“오늘 본 영화, 그 여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왜 자기 이름을 속였을까?”
지후는 고민에 빠진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자기가 지켜온 정적의 세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이름은 결국 타인에게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맞아.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 건,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몰라. 그게 비겁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더라."
유진은 손 끝에 영화 홍보 전단지를 톡톡 건드렸다.
"지후야, 넌 가끔 네 이름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없어? 누가 '지후야' 하고 부르면, 그 이름에 걸맞은 표정을 지어야 하고, 그 이름이 가진 역사만큼 성실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말이야."
지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난 요즘 내가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어. 아무도 나를 정의하지 않고, 나조차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들이... 마치 고장 난 시계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평온해."
지후는 유진과 나누는 이 여백 가득한 대화 속에서 더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영화 얘기를 하는 건지, 우리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지후의 말에 유진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유진의 작업이 마침표를 찍었다. 화면 속에 담긴 것은 비어 있으나 결코 텅 비지 않았다. 여백 그 자체가 스스로 밀도를 만들어내는 기이한 조화였다. 그것은 유진이 학창 시절부터 그토록 열망하던, 모든 선을 덜어내고도 진심에 닿을 수 있는 바로 그 세계였다. 지후는 유진이 마침내 도달한 그 정점을 응시하며 경외감을 느꼈다. 대단하다는 감탄이 마음을 스쳤으나, 그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서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계약서에 명시된 우리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제 더 이상 '업무'라는 건조한 명분 뒤에 숨어 서로의 여백을 탐닉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너도. 네가 아니었으면 이 여백을 확신하지 못했을 거야.”
유진이 노트북을 덮으며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우리, 축하주라도 하러 갈까? 이렇게 깔끔하게 끝났는데 그냥 헤어지기는 좀 아쉽잖아.”
두 사람은 근처의 작은 선술집으로 향했다. 함께 식사한 적은 있었으나 술잔을 맞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노란 조명 아래 놓인 투명한 술잔과 쌉싸름한 알코올의 냄새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지후는 잔을 든 유진의 손등에 내려앉은 미세한 흉터와 단단해진 마디를 보며, 그녀가 이제 완연한 어른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우리는 변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낡아졌으며, 동시에 성숙해졌다.
“처음엔 말이야,”
유진이 차가운 맥주 잔을 입술에 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이 작업을 맡았다고 했을 때 정말 망설였어. 우리, 마지막이 그렇게 예쁘진 않았잖아. 그래서 지금의 내 빈틈을 보여주는 게 실망스러울까 봐 겁나더라.”
“실망이라니. 난 오히려 네 그림에서 숨 쉴 곳을 찾았는걸.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잠시 샛길로 빠져나온 기분이었어.”
지후의 말에 유진이 쓰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잔 바닥에 남은 거품이 느리게 꺼져갔다. 유진이 턱을 괴고 지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거 다행이네. 사실 나도 이번 작업 내내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어. 고등학생 때 우리가 나눴던 말들이 자꾸 그림 위에 겹쳐지더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도망칠 곳을 만드는 능력이 늘어나는 걸까? 예전엔 정면으로 부딪쳐서 모든 면을 채워야 사랑도 일도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슬쩍 비껴가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어려워.”
“맞아. 나도 요즘 그래. 모든 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데, 가끔은 그 평화가 나를 지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거든. 너랑 영화를 보고 그림을 얘기하는 시간 동안만 내가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어. 그게 좋으면서도 사실 좀 무서웠어.”
유진이 지후의 잔에 술을 따르며 나직이 물었다. 따스한 조명 아래서 유진의 눈동자가 지후의 얼굴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뭐가 무서워? 이제 우리 각자 잘 살고 있는데. 너 카톡 배경 사진 보니까 집도 되게 아늑해 보이더라. 넌 예전부터 그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내가 다시 나타나서 네 일상이 흔들릴까 봐 그래?”
유진은 다영의 존재를, 지후가 이미 누군가의 남편이자 일상의 수호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무지함이 유진의 눈빛에 묘한 기대를 실어 보냈다. 지후는 대답 대신 술을 삼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액체가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일상보다는, 내가 흔들릴까 봐 무섭지. 너랑 있으면 내가 다른 동네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내 삶의 매듭들을 잠시 풀고 너라는 여백 속으로 아주 들어가 버리고 싶을까 봐.”
지후의 솔직한 고백에 유진의 손끝이 맥주 잔 가장자리에서 멈칫했다. 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우린 참 비겁한 작가들이네.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지듯, 술기운이 깨면 다시 각자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까. 그런데 지후야, 난 가끔 영화관 불이 영원히 안 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지금처럼 말이야.”
밤이 깊어갈수록 대화는 영화의 미장센에서 기억의 습작들로, 다시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침묵의 여백으로 흘러갔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테이블 위로 흩어졌지만, 누구도 그것을 매듭지으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다영의 남편도 유진의 옛 연인도 아닌, 오직 서로의 시선 속에만 존재하는 투명한 연인으로 남고 싶다는 유혹이 지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았다.
가게 문을 열고 길가로 나서니, 예상보다 이른 겨울 공기가 길모퉁이에 미리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익숙한 관성에 이끌려 같은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멀티플렉스 외벽에는 오늘 우리가 함께 보았던 영화의 커다란 대자보가 고광도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스틸컷 속 주인공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이상하지.”
“뭐가?”
“분명히 끝났는데, 자꾸만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계속 생각나고.”
지후는 그것이 영화가 남긴 지독한 여운 때문일 거라 짐작하며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럴 수 있지. 워낙 잔상이 강한 영화였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겨울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 위로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영화 말고, 지후 너 말이야.”
공기 중으로 예상치 못한 단어가 입자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 지후는 자석에 끌리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유진 역시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한 발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듯 보였다.
그동안 이 묘한 떨림은 그저 과거의 길고 지난한 추억이 보낸 잔향일 뿐이라고, 혹은 함께 본 영화가 남긴 시각적인 잔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업무라는 건조한 명분 뒤에 숨어 서로를 탐색하던 그 모든 시간은 사실 이 고백을 유예하기 위한 알리바이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의 불이 꺼진 뒤에도, 차가운 거리로 밀려 나온 뒤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건 영화 속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영 내내 옆자리에서 느껴지던 온기, 어둠 속에서 조용히 오르내리던 지후의 어깨, 그리고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의 존재였다. 유진의 눈동자 속에는 영화의 미장센보다 더 또렷한, 숨길 수 없는 진심의 농도가 고여 있었다.
“다음에…… 우리 다시 한번 만나볼까.”
업무라는 건조한 핑계도, 영화라는 부드러운 알리바이도 덧대지 않은 채로. 그저 너와 나라는 이름만 남겨진, 그 어떤 이유도 붙이지 않는 투명한 만남으로.
지후는 대답을 위해 입술을 뗐으나, 문장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쉽게 흘러나오지 못했다. 대답하기까지는 아주 짧지만 지독히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찰나 속에서 지후는 집 안의 단정한 풍경들을 떠올렸다. 식탁 위에 나란히 놓인 다영과의 머그잔, 정해진 시간에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 자신이 마땅히 지켜내야 했던 일상의 질서들. 그러나 동시에, 유진이 보여준 그 광활한 여백 속으로 영원히 침잠하고 싶다는 비겁한 갈망이 그 질서들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지후가 망설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유진의 얼굴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고 다가온 온기는 지후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서로의 빈틈을 확인하고, 각자가 짊어진 현실의 무게를 잠시 외면하기로 한 공모의 시작이었다. 지후는 감은 눈꺼풀 너머로 영화관의 불이 영원히 켜지지 않기를, 이 술기운이 결코 깨지 않기를 바랐다. 입술에 닿은 유진의 숨결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했고, 그 순간 지후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평범한 가정의 문틀이 비로소 완전히 부서져 나가는 환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