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미장센

by 태화

지후는 골목의 초입에서 멈춰 섰다. 신도시의 가구 매장에서 묻어온 눈부신 조명의 잔상이 망막 위에 떠다녔다. 조금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차 안이 '모든 것이 약속된 세계'였다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낡은 보도블록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계'였다.


지후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유진이 보낸 메일함에는 '최종본'이라는 딱딱한 이름의 파일이 매달려 있었다.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 압축이 풀리듯 지후의 심장 근처도 팽창했다.

파일이 열렸다. 화면 가득 펼쳐진 유진의 작업물은 기이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그것은 유진이 학창 시절 그토록 열망하던 바로 그 '비움'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그림의 아주 구석진 자리, 연필 선이 간신히 머물다 간 듯한 미세한 형상 하나가 지후의 눈을 멀게 했다. 그것은 고등학교 뒷마당에 놓여 있던, 다리가 하나 짧아 늘 덜컹거리던 그 나무 벤치였다.


"채우지 않겠다는 건, 결국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구나.“

지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은 계약을 끝내겠다고 말하며 가장 선명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녀가 말한 '잘 지내'는 안부가 아니라, 내가 비워둔 이 자리를 보며 평생 네가 가진 것들을 의심하며 살라는 지독한 연애의 저주 같았다.


그때, 다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영]: 남편, 아까 본 식탁 결제했어. 다음 주 수요일에 온대. 이제 우리 집도 조금씩 채워지나 봐. 조심히 와.

'채워진다'는 단어가 지후의 폐부를 날카롭게 긁었다. 다영에게 삶은 무언가를 사들이고, 배치를 바꾸고, 번듯한 가구로 빈틈을 메꾸는 성실한 과정이었다. 그녀는 지후의 마음속에 생긴 거대한 구멍조차 새 가구의 안락함으로 덮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 안락함이야말로 지후에게는 가장 비좁은 감옥이었다.


지후는 길 건너편 전광판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영화 광고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영의 말대로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지고 관객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고 어른의 도리다. 하지만 지후는 지금, 불이 켜진 상영관 한복판에서 나가기를 거부한 채 주저앉아 있는 기괴한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지후는 다영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유진에게 짧은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아니, 그것은 답장이 아니라 자백에 가까웠다.


[지후]: 유진아, 나는 아직 극장 밖으로 나가지 못했어. 불은 켜졌는데, 내 눈에는 여전히 네가 비워둔 그 여백만 보여.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지후는 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이 아닌, 유진의 작업실이 있는 낡은 동네로 향하는 지하철 입구였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지후는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다영이 정성껏 발라준 핸드크림 향취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 피부는 지독하게 건조했다. 다영이 차려놓을 저녁 식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 그리고 "정리하고 왔지?"라고 묻지 않으면서도 온몸으로 질문할 그녀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는 이제 안다. 자신은 결코 다영이 원하는 '단란한 미장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유진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을 때,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지후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그 그림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다영과의 7년은 '실패한 미학'으로 남을 것이고, 그는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후는 손잡이를 돌렸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다영의 향긋한 차 향기가 아닌, 유진이 늘 풍기던 쌉싸름한 물감 냄새와 서늘한 공기였다.

"유진아.“


작업실 안에서 붓을 씻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지후의 메시지를 확인한 듯, 슬픔과 체념,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기쁨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이었다.


"결국 왔네, 비겁하게.“

유진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지만 날카로웠다. 지후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름에 걸맞은 표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심장에 수렴된 그 지독한 여백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질 뿐이었다.

유진의 작업실은 빛이 잘 들지 않아 늘 조금씩 눅눅했다. 지후는 그 습기 속에 발을 들이며, 자신이 다영과 함께 꾸렸던 그 뽀송뽀송하고 건조한 세계가 얼마나 인위적인 것이었는지 감각했다. 유진은 붓을 든 채 지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반가움보다는 피로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비겁하다고 했나.”


지후가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유진은 붓을 씻던 통에 물을 휘저으며 답했다.

“응. 그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너는 네가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나한테 떠넘긴 거야. 이제 나는 네가 버린 그 단란한 가정을 무너뜨린 파괴자가 되어야 하니까. 너는 그저 ‘여백’을 찾아온 예술적인 방랑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말이야.”


유진의 말은 서늘한 바늘이 되어 지후의 명치를 찔렀다. 지후는 유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유진의 몸에선 차가운 물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그것은 다영이 정성껏 빨아 말린 셔츠의 섬유유연제 향기와는 대척점에 있는, 생의 가공되지 않은 냄새였다.


그 시각, 다영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가구점에서 보았던 그 원목 식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 식탁이 거실 한복판에 놓인 환영을 보고 있었다. 지후가 메시지로 보낸 '어둠 속에 남기로 했다'는 말은 다영에게 슬픔보다 모욕감을 주었다.


다영은 지후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지후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들과 유진의 이름이 적힌 계약서 초안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영은 그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녀의 손길은 정갈했지만, 눈동자에는 지독한 결기가 서렸다. 그녀는 지후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본질은 지후라는 인간 자체보다 '지후와 함께 구축한 자신의 질서'를 사랑하는 것에 가까웠다.


다영은 휴대폰을 들어 유진의 번호를 눌렀다. 지후가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지후의 통화 목록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업실의 정적을 깬 것은 지후의 코트 주머니가 아닌, 책상 위에 놓인 유진의 휴대폰 진동이었다. 유진은 어깨에 기댄 지후를 밀어내지 않은 채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지만, 유진은 직감했다.

“네 아내 될 사람인가 봐.”

유진이 건조하게 말했다. 지후의 몸이 굳었다.

“받지 마.”


“아니, 받아야 해. 이건 네 여백의 문제가 아니라, 내 현실의 문제거든.”

유진은 스피커폰을 켰다. 짧은 신호음 끝에 들려온 다영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상냥했다. 그 상냥함이 지후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작가님, 늦은 시간에 실례해요. 지후 씨 거기 있죠?”


유진은 지후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여기 있어요.”


“아, 다행이네요. 그럼 전해줄래요? 아까 결제한 식탁, 지후 씨 카드로 60개월 할부 긁어놨다고요. 취소는 안 될 거예요. 그리고 내일 오전에 양가 부모님 모시고 예식장 시식하러 가기로 한 거, 늦지 말라고 전해줘요. 거기서 안 나타나면, 그땐 정말로 작가님 작업실로 부모님들 다 모시고 갈 테니까.”


다영의 목소리는 파동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일상의 질서'와 '사회적 책임'으로 지후의 목줄을 당겼다. 지후는 다영의 목소리 너머로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 집의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을 느꼈다.


“지후야, 듣고 있지?”


다영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지후는 다시 그 '지후'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렸다.


전화가 끊겼다. 작업실에는 다시 눅눅한 정적이 찾아왔다. 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지후를 바라보았다.

“어때, 지후야. 이제 좀 영화 같아? 아니면 비루한 현실 같아?”


지후는 유진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유진이 그려준 여백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지만, 다영이 결제한 '60개월 할부 식탁'이 이미 그의 삶을 짓누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미학이었으나, 결혼은 비루한 미장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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