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전광판의 윙윙거리는 전기음, 그리고 자신의 가슴속에서 서까래가 내려앉는 듯한 파열음까지.
유진은 지후의 흐트러진 코트 깃을 천천히 바로잡아 주었다. 그녀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눈빛은 방금 나눈 온기보다 더 깊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고백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내일 또 보자는 약속도 없었다.
그 정적은 '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숲으로 들어왔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유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지후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자석에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보다 길고 아득했다. 현관문 앞에 서자 도어락의 번호판이 파랗게 빛났다. 이 번호는 다영에게만 함께 공유한 우리의 '안전번호'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안은 지독하리만큼 정온(靜溫)했다.
다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지후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투명함을 띠고 있었다. 다영은 지후에게 유진의 존재를 물었을 때, 화를 내거나 울지 않았었다. 대신 그녀는 서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그 여자랑 정리하고 와. 그때까진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정리가 끝나면, 다시 예전의 우리로 돌아오기만 해. 난 여기 있을 거니까.“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유예된 심판이었다. 지후에게는 그 어떤 비난보다 무거운 족쇄였다.
"왔어? 술 냄새가 좀 나네.“
다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후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지후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유진이 코트 깃을 만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지후는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뒤로 뺐다. 다영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아... 밖이 너무 추워서 그래. 몸이 좀 굳었네.“
비겁한 변명이 거실 바닥으로 흩어졌다. 다영은 모르는 척 희미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 마실래? 아니면 바로 씻을 거야?"
그녀의 질문은 일상적이었고, 배려 깊었으며, 그래서 지독하게 숨이 막혔다. 다영은 지후가 유진이라는 '여백'으로 도망칠 때마다, '확신'이라는 단단한 벽으로 그를 다시 가두었다. 지후는 식탁 위에 놓인 청첩장 샘플을 응시했다. 유진과의 입맞춤이 남긴 쌉싸름한 감각이 아직 입술에 남아 있는데, 다영이 타준 차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지후는 깨달았다. 유진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이 투명해지는 해방감을 느꼈지만, 이 집에 들어선 순간 자신은 다시 '지후'라는 이름의 무거운 배역을 맡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방으로 들어와 셔츠를 벗던 지후의 손이 멈췄다. 거울 속의 자신은 유진의 말대로 '이름에 걸맞은 표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진]: 잘 들어갔어?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은 다영이 공들여 쌓아 올린 이 집의 정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지후는 문 밖에서 들리는 다영의 조용한 발소리와 휴대폰 화면 속 유진의 문장 사이에서, 자신이 어느 쪽으로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실종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다영은 약속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젯밤 지후의 옷에 배어 있던 낯선 향기도,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던 휴대폰 불빛도 그녀는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그 정적이 깊어질수록 지후의 숨통은 조여왔다. 차라리 다영이 소리를 지르거나 뺨이라도 때려준다면, 그 매를 맞고 유진에게로 아주 도망쳐버릴 핑계라도 생길 것 같았다.
“오늘 가구점 예약해 뒀어. 남편이 말했던 그 넓은 원목 식탁, 들어왔대.”
토요일 아침, 다영은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렸다. 지후는 입안이 깔깔해 베이컨을 씹는 것조차 고역이었지만,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영의 ‘기다림’에 응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가구 매장은 눈이 시릴 정도로 환했다. 전시된 거실과 안방의 모습들은 마치 지후의 미래를 박제해 놓은 쇼윈도 같았다.
“이 식탁 어때? 여기서 오빠는 글 쓰고, 나는 옆에서 책 읽고. 우리가 꿈꾸던 그림이잖아.”
다영이 손으로 원목의 매끄러운 결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은 단호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지후는 그 손길 아래 놓인 나무판데기가 꼭 관 뚜껑처럼 느껴졌다. 유진과 나누었던 ‘여백’의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유진이라면 이 식탁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무 꽉 찼어. 여기서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아. 비어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남편, 듣고 있어? 무슨 생각해?”
다영의 목소리에 지후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다영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서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
“아, 응. 좋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남편은 늘 그런 식이지. 내가 좋으면 다 좋다고. 그게 배려인 줄 알아? 그건 그냥 지후 네 마음이 여기 없다는 뜻이야.”
다영의 직설적인 공격에 지후는 할 말을 잃었다. 다영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평온한 가면을 썼다.
“상관없어. 남편 마음이 어디 가 있든, 결국 돌아올 곳은 여기니까. 그 여자랑 보낸 시간은 그냥 영화 한 편 본 셈 쳐. 엔딩 크레딧 올라가면 불 켜지고 극장 밖으로 나와야 하잖아. 그게 어른이야.”
다영의 말은 지후가 스스로에게 했던 변명과 똑같았다. 하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니 그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타협’에 불과했다.
매장을 나와 차로 돌아온 지후는 핸들을 잡은 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진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작업의 최종 검수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메일의 본문은 짧았다.
[파일 보냈어. 이걸로 우리 계약은 정말 끝이네. 여백을 채우는 건 이제 네 몫이야. 잘 지내.]
‘잘 지내’라는 평범한 인사가 지후에게는 절교 선언보다 아프게 박혔다. 유진은 도망갈 틈을 열어주지 않은 채 자신의 여백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지후는 거울을 보았다. 조수석에서 지도를 검색하는 다영의 옆얼굴과, 휴대폰 화면 속 유진의 차가운 문장 사이에서 지후의 표정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다영아.”
“응?”
“나... 잠시만 내려서 걷다 갈게. 머리가 좀 아파서.”
다영은 핸드폰을 끄고 지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실망감과 체념, 그리고 지독한 소유욕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지후를 놓아주는 척했다.
“알았어. 집에서 저녁 차려놓고 기다릴게. 너무 늦지 마.”
지후는 차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차 안의 그 ‘완벽한 안락함’에서 벗어나야만 살 것 같았다. 차갑고 비루한 거리로 나온 지후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에는 방금 유진이 보낸 파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는 순간, 다영이 차려놓은 저녁 식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지후는 직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