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만찬

by 태화

다영의 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작업실의 스피커폰에서는 지직거리는 미세한 정전기 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지후의 신경줄이 타 들어가는 소리 같았다. 유진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액정의 불빛이 꺼지자 작업실은 다시금 눅눅한 어둠 속에 잠겼다.


"60개월이라니, 지독한 숫자네.“


유진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는 붓을 씻던 물통을 비우러 싱크대로 향했다.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다영이 긁어버린 '60개월 할부'는 단순한 결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5년 동안, 매달 정해진 날짜에 지후의 통장에서 빠져나갈 충성심의 할당량이었고, 그가 유진에게로 도망치려 할 때마다 발목을 낚아챌 쇠사슬이었다.

"다영이는... 원래 그런 애야. 한 번 정한 건 끝까지 밀어붙여. 그게 사랑이든, 증오든.“

지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유진은 수건에 손을 닦으며 지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연민도, 기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그게 다영씨의 성격이라고 말하지만, 지후야, 그건 네가 그동안 다영씨한테 준 '확신'의 대가야. 너는 7년 동안 다영씨한테 '나는 안전한 남자다'라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고, 다영씨는 그 연기를 믿고 자기 인생의 60개월을 베팅한 거지. 이제 와서 관객이 속았다고 화내는 게 이상한 거야?“


유진은 지후의 코트를 가리켰다.


"가봐. 내일 상견례 늦지 말고. 양가 부모님까지 모신다며. 거기서 안 나타나면 다영씨는 정말로 여기로 올 사람이야. 나는 내 작업실이 네 치정극의 무대가 되는 건 질색이거든.“


지후는 유진의 냉정한 태도에 서운함보다 절망을 느꼈다. 그는 유진이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 "가지 마, 우리 그냥 여기서 이대로 여백으로 남겨지자"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유진은 현실의 중력을 너무나 잘 아는 어른이었다. 그녀에게 지후는 잠시 '영화적 환상'을 채워준 소중한 소품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일상을 파괴하면서까지 껴안아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


지후는 유진의 작업실을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차를 두고 온 탓에 지하철을 타야 했다. 막차를 기다리는 승강장에는 피곤에 찌든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지후는 그들 틈에 섞여 자신의 얼굴을 전동차 유리창에 비춰보았다.


거기엔 '첫사랑을 쫓는 낭만적인 남자'는 없었다. 그저 카드 할부금과 예식장 예약 취소 위약금을 계산하며 전전긍긍하는, 지극히 비루하고 평범한 예비 신랑만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다영과 함께 쓰던 도어락 번호를 누를 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을 열자 집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식탁 위에는 다영이 차려놓은 저녁 식사가 뚜껑이 덮인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지후는 식탁 의자에 앉아 뚜껑을 열어보았다. 식어버린 된장찌개 위에 하얗게 굳은 기름기가 떠 있었다. 다영은 안방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후는 그녀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지후가 돌아오는 소리를, 그가 식탁 의자를 끄는 소리를, 맥주 캔을 따는 소리를 하나하나 수집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후는 찌개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짜고 비렸다. 하지만 그는 꾸역꾸역 그것을 삼켰다. 그것이 다영이 허락한 '유예된 삶'의 맛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후는 정장을 챙겨 입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유진이 말했던 '이름에 걸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방에서 나온 다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후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넥타이 삐뚤어졌네. 오늘 부모님들 보는데 신경 써야지.“


다영의 손길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지후는 그녀의 손길이 목을 죄는 올가미처럼 느껴져 숨이 가빴다.


"다영아, 나 어제...“


지후가 입을 떼려 하자, 다영은 손가락을 지후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유진과의 입맞춤이 남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쉿. 아무 말 마. 어제 일은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다 두고 왔다고 했잖아. 우리 오늘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식탁에 놓을 그릇도 보러 가자. 알았지, 남편?“


다영은 웃었다. 지후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60개월의 집요함을 보았다. 지후는 결국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안다. 자신은 유진의 여백 속으로 도망칠 용기가 없는, 그저 다영이 짜놓은 정교한 미장센 속의 말 잘 듣는 배우일 뿐이라는 것을.


상견례를 위한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 지후는 창밖을 보았다. 봄이 오고 있었지만, 지후의 계절은 60개월 할부의 긴 겨울 속으로 이제 막 진입하고 있었다.


식당은 지나치게 환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가짜 보석들을 잔뜩 매달고 비현실적인 광휘를 뿜어냈고, 테이블마다 놓인 조화들은 생화보다 더 생생한 표정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이미 도착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샴페인 기포처럼 가볍게 떠다녔지만, 지후에게는 그것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납덩이 같았다.


“지후야,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요즘 회사 일이 힘드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지후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 옆에서 다영은 지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적당히 온화했고, 그 온기는 지후에게 ‘딴생각하지 말라’는 조용한 압박으로 전해졌다.


“어제 늦게까지 결혼 준비하느라 고생해서 그래요, 어머니. 식탁이며 그릇이며 지후 씨가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다영의 목소리는 시식실의 공기처럼 매끄러웠다. 지후는 그녀의 능수능란한 거짓말이 경이로우면서도 끔찍했다. 60개월 할부로 결제된 그 원목 식탁이, 사실은 지후의 유예된 자유를 담보로 산 감옥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시식용 코스 요리가 차례로 서빙되었다. 화이트 와인이 잔에 채워지고, 고급스러운 이름의 애피타이저가 접시 위에 놓였다. 지후는 포크를 들었지만, 입안이 모래를 씹는 듯 까칠했다.


“작가님 작업은 잘 마무리됐니?”

장인의 툭 던진 한마디에 지후의 포크가 접시 가장자리에 부딪혀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순간 테이블의 대화가 멈췄다. 다영의 시선이 지후의 옆얼굴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아, 네. 어제부로 다 끝났습니다. 아주... 여백이 많은 그림이었어요.”

지후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유진의 작업실, 그 눅눅한 습기와 쌉싸름한 물감 냄새가 이 화려한 식탁 위로 번지는 것 같았다. 다영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무심하게 덧붙였다.

“작가님이 참 독특하시더라고요. 꽉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걸 좋아하신대요. 그런데 사실 살다 보면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게 훨씬 어렵잖아요? 가구도 들여놓아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하고, 부모님들 모시려면 마음속 여백 따위는 챙길 틈도 없죠.”


다영의 말은 유진의 미학을 ‘철없는 소리’로 치부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허허 웃으며 “맞는 말이다, 삶이 무슨 예술이냐, 생활이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지후는 접시 위에 놓인 어린 잎사귀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장식을 위해 존재할 뿐,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은 채 시들어갈 운명이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 지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진이었다.

지후는 다영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유진이 SNS에 올린 새 게시물 알림이었다. 지후는 테이블 밑에서 몰래 화면을 켰다.

화면 속에는 유진의 짐 가방과 텅 빈 작업실 바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짧은 문구 하나.

[상영 종료. 극장 문을 닫습니다.]


지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진은 정말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지후가 다영의 60개월 할부 식탁 앞에 앉아 고기를 씹고 있는 사이, 유진은 자신이 비워둔 여백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준비를 마친 것이다.

“지후야, 고기 식겠다. 얼른 먹어.”

다영이 지후의 접시 위로 소스를 듬뿍 묻힌 고기 한 점을 덜어주었다. 지후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육즙은 달콤했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각은 비릿했다. 그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이 식탁 위의 안락한 연극을 완수하고 60개월의 할부 인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비릿한 고기를 뱉어내고 닫히는 극장의 문 사이로 몸을 던질 것인지.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지후가 갑자기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시식실의 정적을 깼다. 다영은 지후의 팔을 잡으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불안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애착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오빠, 늦지 마. 곧 디저트 나올 거야. 우리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잖아.”

다영의 목소리는 애원 같기도, 명령 같기도 했다. 지후는 대답 대신 뒤돌아 시식실을 나섰다. 복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꽉 끼는 정장 속에 갇힌 시체 같았다.


지후는 식당 출구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60개월의 할부도, 양가의 기대도, ‘지후’라는 이름의 무게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유진이 남긴 그 시리고 광활한 여백뿐이었다.

출구 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지후의 뺨을 때렸다. 식당 안의 조화 냄새가 아닌, 진짜 겨울의 냄새였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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