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건물 밖으로 터져 나오자, 정오의 햇살이 지후의 눈을 난폭하게 찔러왔다. 단단하게 고정된 정장 구두가 보도블록을 찍어 누를 때마다 발목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후는 멈출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 화려한 '시식실'이라는 이름의 만찬장 안에서, 다영이 우아하게 나이프를 들고 자신의 심장을 조각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지후는 택시를 잡아타고 유진의 작업실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신도시의 풍경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다영과 함께 꾸려가려 했던, 60개월의 할부금이 촘촘하게 박힌 그 견고한 미래들이 비명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작업실이 있는 낡은 골목은 지독하게 조용했다. 지후는 숨을 헐떡이며 유진의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유진의 SNS에 올라온 사진대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차가운 금속의 저항감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유진아! 정유진!"
지후는 문을 두드렸다. 이름에 걸맞은 표정 따위는 이미 예식장 카펫 위에 버리고 온 지 오래였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옆집 세탁소에서 나오는 기계적인 증기 소리만이 골목의 정적을 메웠다.
지후는 문 옆, 우편함 속에 꽂혀 있는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그것은 유진이 보낸 작업실 퇴거 확인서였다. 유진은 정말로 미련 없이 짐을 비운 모양이었다. 지후는 망연자실하게 문 앞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정장이 낡은 복도의 먼지로 더러워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였다.
그때, 유진의 작업실 문틈 아래로 작은 종이 한 장이 비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후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유진의 스케치북 한 페이지를 찢어 만든 짧은 쪽지였다.
[지후야.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지는 건 관객을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지 말라고 켜주는 거야. 너는 너무 오래 어둠 속에 머물렀어. 이제 너의 '60개월'을 살길 바라. 내 여백은 내가 가져갈게.]
지후는 쪽지를 쥔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유진은 마지막까지 지후보다 어른이었다. 그녀는 지후의 비겁함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까지 예상해 이 친절하고도 잔인한 작별 인사를 남긴 것이다.
골목 저편에서 낯익은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다영의 차였다. 지후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곳이 없었다. 차에서 내린 다영은 예식장에서 보았던 그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지후의 더러워진 정장 바지와 주저앉은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디저트가 아주 맛있었어, 오빠. 오빠 몫까지 내가 다 먹었어.“
다영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지후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쥐어진 유진의 쪽지를 뺏지 않았다. 대신 지후의 머리카락에 붙은 작은 먼지를 털어내 주었다.
"작가님은 아까 이삿짐 차 타고 나가는 거 봤어. 나도 방금 오는 길에 스쳤거든. 오빠가 여기 올 줄 알았나 봐, 나한테 문자를 남겼더라고. 오빠 좀 잘 데려가라고.“
다영이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지후에게 보여주었다. 유진이 보낸 문자였다.
[지후 씨가 그쪽으로 갈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지후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자신이 유진의 여백에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진은 지후를 사랑했지만, 그의 비겁함까지 사랑해서 자신의 예술을 망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후를 다영이라는 '생활'에게로 반납한 것이다.
"가자, 남편. 부모님들이 기다려. 아까는 남편이 갑자기 체한 것 같다고 내가 잘 말씀드렸어.“
다영은 지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지후는 인형처럼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일어났다. 다영의 손은 지독하게 단단했다.
"식탁, 아까 본 것보다 한 단계 더 비싼 걸로 바꿨어. 60개월 할부는 똑같아. 이제 남편은 그 식탁에서 내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 아주 성실하게 갚아나가기만 하면 돼.“
지후는 다영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안에는 지후가 잊고 싶어 했던 그 익숙하고 아늑한 방향제 냄새가 가득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 지후는 백미러로 멀어지는 유진의 작업실 건물을 보았다.
이제 극장의 불은 완전히 켜졌다. 관객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고, 스크린에는 아무런 잔상도 없었다. 지후는 눈을 감았다. 다영의 차는 거침없이 신도시의 그 견고한 아파트 숲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지후의 인생에서 가장 긴 '할부의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후를 맞이한 것은 낯선 나무 냄새였다. 가구점 매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짙은 색의 원목 식탁이 거실 한복판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영이 배송 일자를 앞당긴 모양이었다. 그 식탁은 마치 이 집의 새로운 주인이라도 되는 양, 육중한 무게감으로 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기사님이 방금 두고 가셨어. 남편이 좋아하는 결로 고르느라 애 좀 먹었네.”
다영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식탁 위로 다가가 마른 행주로 표면을 닦았다. 그녀의 손길은 경건하기까지 해서, 마치 어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보였다. 지후는 그 식탁의 모서리를 보았다. 각이 딱 떨어진 그 끝부분이 자신의 심장 언저리를 찌르는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떴다.
“예쁘네.”
지후가 내뱉은 문장은 영혼 없이 거실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영은 지후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생긋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여기서 밥 먹자. 남편이 좋아하는 명란젓이랑 무국 끓여놨어.”
지후는 정장을 벗지도 못한 채 그 거대한 식탁 앞에 앉았다. 의자를 뒤로 뺄 때 바닥과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다영이 정갈하게 차려낸 밥상은 그 넓은 식탁 위에서 섬처럼 외로워 보였다. 지후는 숟가락을 들었지만, 나무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유진이 작업실에서 쓰던 거친 캔버스의 감촉이 살아나 괴로웠다.
밤이 깊어지자 다영은 안방으로 들어갔고, 지후는 거실에 남았다. 노트북을 켰지만 커서는 깜빡거리기만 할 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유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파일, 그 텅 빈 프레임 속에 담긴 벤치의 잔상이 모니터 위로 겹쳐 보였다.
지후는 유진의 SNS를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유진의 계정은 이미 삭제되어 있었다. '상영 종료'라는 문구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디지털의 세계에서조차 자신의 여백을 완벽하게 수거해버린 것이다. 지후는 마우스 휠을 굴리다 멈췄다. 이제 유진과 연결된 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다영이 긁은 60개월의 할부금 영수증만이 지후의 지갑 속에서 바스락거릴 뿐이었다.
그때, 다영이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지후의 뒤에 서서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글 안 써져? 작가님 그림 보고 영감 좀 얻었나 싶었는데.”
지후는 서둘러 노트북을 덮었다. 다영의 목소리에는 비난도, 조롱도 없었다. 그저 '나는 네가 무엇을 보는지 다 알고 있다'는 지독한 평온함만이 가득했다. 다영은 지후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가운 약혼반지가 지후의 쇄골 근처를 건드렸다.
“지후야 나는 너가 그 작가님을 추억하는 것까지는 상관없어. 어차피 그건 네 머릿속의 영화 같은 거니까. 영화는 다시 보기 할 순 있어도, 영화 속에 들어가서 살 순 없잖아.”
다영은 지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근데 이 식탁은 현실이야. 우리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마주할 진짜 나무고, 진짜 밥상이라고. 나는 이 현실을 너랑 평생동안 닦고 광내면서 지켜낼 거야. 그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고, 너가 나한테 진 빚을 갚는 방식이야.”
다영의 손길이 지후의 가슴팍으로 내려와 심장 박동을 확인하듯 머물렀다. 지후는 숨을 멈췄다. 다영은 유진을 질투하지 않았다. 다만 유진을 지후의 인생에서 '실체가 없는 환상'으로 박제해버림으로써, 자신이 가진 '실체'의 힘을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었다.
다영은 지후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이끌었다. 거실의 불이 꺼지자, 달빛 아래 홀로 남겨진 원목 식탁이 기괴하게 거대해 보였다. 지후는 끌려가는 발걸음 끝에 문득 깨달았다. 다영이 말한 60개월은 단순한 상환 기간이 아니라, 지후가 유진을 완벽하게 잊기 위해 거쳐야 할 지독한 세뇌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날 밤 지후는 꿈을 꿨다. 유진의 텅 빈 작업실 바닥에 다영이 결제한 식탁이 놓여 있고, 자신이 그 식탁 위에 유진의 물감들을 쏟아붓는 꿈이었다. 물감은 나무의 결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고 핏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지후는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영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라도 유진의 그 시린 여백을 조금 더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