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납되지 않은 죄

by 태화

신혼집의 침실은 소음 하나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다영이 고른 고가의 암막 커튼은 외부의 빛을 완벽히 차단했지만, 그 밀폐된 어둠은 지후에게 안온함보다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주었다.


다영은 잠옷 차림으로 지후의 등 뒤에서 몸을 밀착해 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후의 파자마 단추 사이를 파고들었다. 눅눅한 체온과 함께 다영의 입술이 지후의 귓가에 머물렀다.


"남편, 오늘 많이 피곤해?"


지후는 몸을 굳힌 채 천장만을 응시했다. 다영의 손길이 가슴팍을 지나 아래로 향하려 할 때, 지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미안해, 다영아. 오늘 미팅이 많아서 그랬는지 몸이 좀 무겁네. 그냥 잠만 자고 싶어."


어둠 속에서 다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짧은 정적 끝에 그녀는 붙잡힌 손을 빼지 않은 채 지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일은 아기 용품점 가기로 했잖아. 나 빨리 남편 닮은 잘생긴 아들, 그리고 나 닮은 예쁜 딸 낳아서 완벽한 가정 꾸리고 싶어. 이제 우리 인생에 남은 빈칸은 그거 하나뿐이잖아, 그치?"


다영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지후는 그 안에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무게를 느꼈다. 그녀는 지후의 어깨를 돌려 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희미한 취침등 불빛 아래 비친 다영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남편이 피곤한 게 몸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머릿속에 남은 그 '여백' 때문인지 모르겠네."


지후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다영은 지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이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래, 자자. 내일은 바쁠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아기 용품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영은 어젯밤의 거절 따위는 잊은 듯 들뜬 목소리로 카탈로그를 넘겼다.


"남편, 이 유모차 어때? 식탁이랑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건데 프레임이 아주 견고하대. 아이가 타는 건데 제일 튼튼한 걸로 해야지."


지후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영의 대화 속에서 모든 사물은 '견고함'과 '안정'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되었다. 흔들림 없는 삶. 그것이 다영이 설계한 신도시의 복음이었다. 하지만 지후의 머릿속엔 자꾸만 유진의 '헐거운' 그림들이 떠올랐다. 툭 치면 쓰러질 듯 위태로운 선들이 오히려 더 진실해 보였던 그 밤의 공기들.


"남편, 내 말 듣고 있어? 어느 쪽 색깔이 더 예쁘냐니까?"


"어... 그레이. 그게 때도 안 타고 좋을 것 같네."


"그럴 줄 알았어. 남편은 늘 무난한 걸 좋아하니까."


다영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메모를 남겼다. 지후는 백미러를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눈은 어느 쪽도 향하지 못한 채 길 잃은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주말을 보내고 돌아온 회사 책상 위에는 정체불명의 소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발신인 이름은 없었다. 다만 익숙한 필체로 적힌 주소만이 지후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급하게 뜯어본 상자 안에는 유진의 단행본 초판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서점용이 아닌, 작가 소장용 증정본이었다. 면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당신이 채워주길 바랐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여백을 남겨두는 게 때로는 가장 완벽한 완성이라는 걸.]


지후는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책의 끝부분에는 작업 당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에필로그가 추가되어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낡은 예술영화관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 남자의 발치에는 끊어진 60개월짜리 영수증들이 눈처럼 쌓여 있었고, 그는 불이 켜진 극장 안이 아니라 어두운 골목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지후는 다영이 정성껏 차려준 저녁 식탁 앞에서 소포로 온 책을 떠올렸다. 입안에 맴도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까슬거렸다.


"남편, 밥이 좀 질어? 왜 제대로 못 먹어."


"다영아. 우리...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닐까. 가구며, 아기 용품이며. 조금만 천천히 숨 좀 쉬면서 하면 안 될까?"


다영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지후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정직한 관찰'의 눈빛이 살아났다.


"무슨 숨? 남편, 지금 숨 못 쉬고 있어? 우리가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잖아. 남들 다 하는 거야. 아니, 남들보다 더 완벽하게 해내고 있잖아."


"완벽한 거 말고, 그냥... 좀 비워두고 싶어서 그래.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로."


다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비워두면, 그 자리에 다른 게 들어오잖아. 남편이 못 잊고 있는 그 '여백' 같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정유진 작가 책 나온 거, 오늘 회사로 배송 갔다며."


지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다영은 지후의 코트 주머니에서 소포에 동봉되었던 메모지를 꺼냈다. 그녀는 이미 퇴근 전 지후의 사무실을 들렀거나, 혹은 그를 감시하는 누군가를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60개월 할부는 가구에만 있는 게 아니야, 남편. 내 인내심에도 할부가 있어. 그리고 이제 1회차가 끝났을 뿐이지. 남편이 어느 쪽을 향해 서 있든 상관없어. 결국 남편이 돌아올 곳은 이 식탁 위고, 내 옆 침대니까."


국물 속에 잠긴 유진의 메모지가 잉크를 뱉어내며 검게 죽어갔다. 지후는 침몰하는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섬뜩함이 거실을 가득 메웠고, 공기는 수정 조각처럼 피부를 찔러왔다. 다영은 어깨에 얹었던 손을 거두고 지후의 맞은편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를 넘어선 무언가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나를 바보로 아는거야?"


다영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숟가락을 집어 들어 식탁 상판을 톡, 톡, 규칙적으로 건드렸다.


"상견례 하던 날 기억나? 남편 부모님 모시고 내가 식당 예약하고, 꽃 사고, 분위기 띄우려고 애쓸 때 너는 화장실 간다면서 30분 동안 안 돌아왔지. 그때 네가 화장실 복도 끝 비상구에서 정유진 이름 검색하고 통화 하고 있었잖아. 나 그거 다 보고 있었어."


지후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다영의 폭로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우리 신혼집 가구 보러 다닐 때도 그랬지. 내가 이 식탁, 이 소파 하나하나 고르면서 우리 미래를 설계할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았어. 나랑 눈 마주치는 게 무서워서 가구 카탈로그만 뚫어져라 보면서, 속으로는 그 여자랑 살았으면 이 거실을 어떻게 비워뒀을까... 그 생각만 하고 있었잖아!"

"다영아, 그건..."


"입 다물어! 아직 안 끝났어."


다영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챙그랑, 하는 파열음이 정적을 찢었다.


"그날, 상견례 때 네가 도망치듯 나갔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해야 할 만찬장에서, 예비 신랑이 첫사랑의 유령을 쫓아 나간 그 비참함을 지후 네가 감히 짐작이나 해? 나는 거기 혼자 남아서 양가 부모님께 남편이 갑자기 체해서 나갔다고 거짓말했어. 웃으면서, 스테이크를 씹어 삼키면서 속으로는 내 심장을 씹어 먹었다고!"


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후의 멱살을 잡듯 그의 셔츠 깃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지독한 증오와 결핍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받아줬어. 네가 그 여자 작업실 앞에서 비참하게 버림받고 돌아왔을 때, 내가 너를 데려왔다고! 왜? 너는 내 '할부'니까. 내가 내 인생을 다 바쳐서 결제한 내 소유물이니까!"


지후는 숨이 막혀왔다. 다영의 손길은 이제 애정이 아니라 밧줄처럼 그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다영은 지후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와서 숨을 쉬고 싶어? 여백을 찾고 싶어? 웃기지 마. 너한테 여백 따위는 허락 안 해. 너는 이제 이 집에서, 이 식탁에서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내가 시키는 대로 아이를 만들고, 죽을 때까지 나한테 진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해. 그게 너가 나를 버리고 그 여자한테 달려갔던 대가야."


다영의 눈물 한 방울이 지후의 뺨 위로 떨어졌다. 뜨거워야 할 눈물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다영은 지후를 거칠게 밀쳐내고 안방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 오늘은 도망 못 가. 남편이 내 인생을 망친 만큼, 나도 남편 인생을 가장 견고하고 답답한 감옥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지후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무너진 다리가 비명을 지르듯 떨려왔다. 지후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짐승처럼, 불이 꺼진 어 둠 속으로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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