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신혼집의 침실은 습기가 가득 찬 수조 같았다. 다영은 지후의 등 뒤에서 몸을 밀착해 오며, 마치 내일의 일정을 확인해주는 상냥한 간수처럼 속삭였다.
"남편,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해. 주말이라 아울렛에 사람 많을 거야. 아기 용품점 가서 리스트 뽑아둔 거 확인해야지. 나 빨리 남편 닮은 잘생긴 아들 낳고, 나 닮은 예쁜 딸 낳아서 완벽한 가정 꾸리고 싶어. 이제 우리 인생에 남은 빈칸은 그거 하나뿐이잖아, 그치?"
그녀의 숨결은 따뜻했으나, 지후의 목덜미에 닿는 그 온기는 마치 서서히 굳어가는 시멘트 같았다. '빈칸'을 용납하지 않는 다영의 설계도 안에서 지후는 자신이 조금씩 박제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다영의 손가락이 지후의 가슴팍을 가볍게 훑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할부로 결제한 커다란 가구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다음 날, 교외의 대형 아울렛은 규격화된 행복을 쇼핑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영은 들뜬 기색으로 아기 용품 매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형광등 불빛이 매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지후의 눈을 난폭하게 찔렀다.
"남편, 이 유모차 좀 봐. 프레임이 정말 견고해. 애기 타는 건데 흔들리면 안 되잖아."
다영은 유모차의 손잡이를 지후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후는 기계적으로 손잡이를 잡고 앞뒤로 밀어보았다. 가죽의 매끄러운 질감,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소리 없는 마찰음. 다영은 앙증맞은 배냇저고리를 몸에 대보며 "이건 아들한테 어울리겠지?" 하고 물었지만, 지후는 그 질문에 대답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매장 안의 모든 물건은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해서, 어떤 상상력이나 여백도 허용하지 않았다. 지후는 자신이 지금 아기 용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을 저당 잡힐 사슬의 굵기를 재고 있는 것 같았다. 다영이 웃으며 건네는 젖병 세트가 마치 자신을 가두는 투명한 벽처럼 느껴질 때쯤, 지후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후는 다영의 시선을 피해 매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숨이 가빴다. 명치 끝에 걸린 이질감을 뱉어내고 싶어 무작정 복도를 걸었다. 화려한 명품 매장과 식당가를 지나 층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을 때, 지후의 시야에 이질적인 공간 하나가 들어왔다. [초대전: 기억의 잔상]. 그 옆에 소박하게 적힌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지후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움 / 정유진
그녀의 이름은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경했고, 동시에 그곳에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운명적이었다. 지후는 홀린 듯 전시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쇼핑객들의 소음이 일시에 차단된 정적의 공간. 공기는 서늘했고, 캔버스 특유의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후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전시장 정중앙, 가장 깊은 조명을 받고 있는 캔버스 앞에 멈춰 섰다. 그림은 지후의 기억 속 가장 아픈 부분을 정교하게 도려내어 옮겨놓은 듯했다.
낡은 교실 창가에 기대앉은 두 소년 소녀. 해질녘의 귤색 빛이 교실 바닥을 가로지르고, 소녀는 시험지 뒷면에 무언가를 정성껏 그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옆모습을 눅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후는 눈을 비볐다. 그림 속 소년의 약간 휘어진 눈매, 살짝 삐져나온 교복 셔츠의 깃, 그리고 책상 모퉁이에 새겨진 작은 칼자국까지. 그것은 지후 자신이었다. 유진이 그토록 지워내려 했던 그 수많은 선들 사이로, 오직 지후만이 알아볼 수 있는 생의 흔적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유진의 그림 속에서 숨 쉬던 그 처연한 감정들의 정체는 원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마 다 쓰지 못한 고백이었고, 수천 번을 덧칠해도 지워지지 않는 ‘지후’라는 이름의 영점(零點)이었다.
그녀가 비워두었던 그 모든 공간이 사실은 지후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지후는 그제야 깨달았다. 유진의 첫사랑도, 마지막 여백도 결국 자신이었다.
"남편, 여기서 뭐 해? 한참 찾았잖아. 전화를 왜 안 받아?"
어느새 다가온 다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서늘하게 꽂혔다. 그녀는 지후의 시선이 머문 그림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다영의 눈이 가늘게 떨리며 그림과 지후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야? 또 이런 실체 없는 그림 보고 있는 거야? 우리 유모차 결제해야 하잖아. 그리고 시부모님도 저녁 같이 먹자고 예약해 두셨다고 계속 연락하시는데. 지금 안 나가면 늦어.”
"그림을 왜 봐? 이게 우리 밥 먹여줘? 우리 아이 기저귀 갈아줘? 이건 그냥 물감 덩어리일 뿐이야. 남편이 아까 손에 쥐고 있는 유모차 손잡이, 그게 진짜라고!"
"이 그림 속의 소년, 나야. 유진이는 단 한 번도 나를 지운 적이 없었어. 그 애가 비워둔 자리가 다 나였다고."
"그래서?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다영의 목소리가 전시장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지후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야 한지후! 정신 차려. 저 여자는 너를 버렸어. 너의 비겁함을 비웃으며 쪽지 한 장 남기고 떠난 여자라고. 근데 나는 어땠어? 네가 그 여자 작업실 앞에서 주저앉아 있을 때, 먼지투성이가 된 너를 일으켜 세워서 차에 태운 건 나야. 너가 갚아야 할 할부금을 같이 짊어지고, 시부모님께 웃으며 안부 전화 드리는 것도 나라고! 근데 지금 고작 이 옛날 그림 한 장 때문에 나를, 우리 미래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다영아, 네가 말하는 미래는... 숨이 막혀. 너는 내 삶의 모든 빈칸을 가구와 가전으로 채워 넣었지.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건 그냥 나를 박제하는 과정이었을 뿐이야."
"박제? 오빠, 그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소린지 알아? 남들은 그 박제된 안정감을 얻으려고 평생을 바쳐. 내가 너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며 꾸며왔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다영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지후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나가면, 아까 본 그 유모차랑 아기 침대, 다 없던 일로 해줄게. 남편이 이 그림 본 것도 내가 눈 감아줄게. 가자, 남편. 응? 우리 식당 늦겠어."
지후는 천천히 다영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니, 다영아. 이제 네 식탁 앞에서 너랑 밥 못 먹을 것 같아.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는, 내가 직접 써야겠어."
다영이 비명을 지르며 지후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후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삭제했다가 수백 번을 다시 외웠던, 아니 뇌 속에 문신처럼 새겨진 그 번호를 눌렀다. 다영이 휴대폰을 뺏으려 달려들었지만 지후는 그녀를 피하며 전시장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신호음이 울리는 짧은 순간, 지후는 아울렛의 화려한 조명들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꺼지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유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진아. 나 지금 네 그림 앞에 서 있어."
잠깐의 정적. 지후는 자신의 등 뒤에서 무너져 내리는 다영의 흐느낌을 느꼈다 "지후야, 가면 안 돼! 가지 마!"라는 절규가 아울렛 복도에 흩어졌다. 하지만 지후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네가 왜 그렇게 선을 지웠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이 빽빽한 현실 속에서 숨이 막혔는지도. 유진아, 나 지금 너한테 가고 있어. 우리 아직 채우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 그거 내가 써도 될까."
지후는 주차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다영의 절규가 멀어졌다. 60개월의 할부도, 견고한 신도시의 아파트도, 다영의 정갈한 밥상도 더 이상 지후를 붙잡지 못했다. 불이 켜진 극장 밖으로, 관객은 드디어 자신의 진짜 집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아울렛의 인공적인 빛을 벗어나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지후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