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계절의 끝

by 태화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던 휴대폰이 어느 순간 비명처럼 날카로운 벨 소리를 토해냈지만, 지후는 단 한 번도 액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 진동은 다영이 촘촘하게 쳐놓은 거미줄의 파동이었고, 응답하는 순간 자신이 쌓아 올린 가녀린 결심이 무너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후는 아울렛의 인공적인 조명을 뒤로하고 인천항 근처, 낡은 공장 지대에 숨어 있는 유진의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붉은 벽돌 건물 3층. '정유진'이라는 이름이 적힌 낡은 명패 앞에 섰을 때 지후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거칠게 밀어젖혔다.


"유진아!"


캔버스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비좁은 공간. 이젤 앞에 웅크리고 있던 유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지후는 그녀를 보자마자 참아왔던 감정을 터뜨리며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찰나, 유진은 구원을 만난 표정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오지 마... 제발, 지후야. 가까이 오지 마."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명확한 '공포'였다. 서른둘, 동갑내기 친구로서 보아온 그녀의 눈동자 중 가장 처절한 빛이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다영 씨가... 그분이 여기까지 왔었어. 네가 그 쪽지를 보고 나를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유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말을 이어갔다.


"그분이 우리 부모님 식당 주방 사진들을 보여줬어.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구석진 곳의 먼지들, 식자재 유통 기한 같은 것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명의 빌려줬다가 조사받았던 기록까지 전부 알고 있더라. 내가 너를 다시 만나면, 그날로 이 자료들 구청이랑 언론사에 뿌리겠대. 우리 부모님 평생 일궈온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겠다고..."


유진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 그림들도... 내가 예전에 습작으로 그렸던 도판들을 해외 작가 작품이랑 교묘하게 이어 붙여서 표절 리포트를 만들었어. 내가 입을 열면, 나는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 될 거야. 지후야, 나는 네가 너무 그리웠지만... 그 여자가 너무 무서워.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야. 거대한 기계 같아."


지후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유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유진의 몸은 마치 한겨울 서리 맞은 나뭇가지처럼 차갑고 앙상했다.


"미안해, 유진아. 내가 너무 늦었어.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지후는 유진의 젖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해결할게. 그 여자가 너를, 네 가족을 건드리지 못하게 내가 다 막을게. 나 이제 도망 안 가. 비겁하게 여백 속에 숨어 있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무서워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지후의 따뜻한 온기가 전달되자 유진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지후의 품에 안겼다. 지후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아주며 다짐했다. 이 끔찍한 구속의 사슬을 제 손으로 끊어버리겠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지후는 자신이 다른 차원의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집안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공기는 정교하게 세공된 얼음처럼 차가웠다. 거실의 모든 물건은 다영의 강박적인 손길을 거쳐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식탁 앞, 다영은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지후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와 신발장에 채 벗어 던지지 못한 분노가 그 정적인 공간을 휘저었지만, 다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왔어? 생각보다 빠르네. 인천항 근처는 퇴근 시간에 많이 막혔을 텐데."


다영의 목소리는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기괴했다. 지후는 식탁을 손으로 내리치며 포효했다. 찻잔 속의 물결이 가늘게 흔들렸지만, 다영의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너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야! 유진이 부모님 식당까지 사람 붙여서 조사하고, 표절 리포트까지 만들어서 협박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후를 보았다. 그 눈은 슬픔도, 분노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잘 닦인 유리창처럼 지후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 단어 선택이 너무 거칠어. 난도질이라니. 나는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방역'을 한 것뿐이야. 60개월, 우리가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는 이 집의 대출금처럼, 평온함에도 비용이 발생해. 벌레가 들어오면 약을 치고, 오염된 곳은 도려내야 이 평온이 유지되는 거잖아?"


"방역? 그게 사람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남편이 그 헐거운 여자한테 흔들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관리하며 이 집을 보존해 왔는지 알아? 남편이 그 여자 작업실에서 여백이니 뭐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때, 나는 남편의 부모님 건강검진 예약하고, 우리 노후 보장 보험 설계하고, 이 완벽한 식탁 위의 메뉴를 고민했어. 그 여자가 준 건 실체 없는 환상이지만, 내가 준 건 발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야."


"그 땅이 나를 질식시킨다고! 이제 이 집도, 너도, 이 끔찍한 연극도 다 끝이야. 이혼해. 내가 유진이한테 진 빚, 내가 다 갚으면서 살 거야."


지후의 선언에 다영의 입가에 묘한 곡선이 그려졌다. 비웃음이라기보다, 정답을 알고 있는 선생이 오답을 적어낸 학생을 보는 가련한 미소였다. 그녀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한편에 놓인 협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어제 온 짙은 색 협탁과 '찰떡'이라던 웨딩 사진 액자 옆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끝? 아니, 남편. 이제 2라운드 시작이지. 진짜 할부는 이제부터거든."


다영이 봉투에서 꺼낸 것은 흑백의 대조가 선명한 종이 한 장이었다. 지후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숨을 멈췄다. 사진 중앙에는 쌀알보다 작은, 그러나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선명한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나 임신했어, 남편. 어젯밤에 남편이 피곤하다며 나를 밀어내기 전, 우리가 그 빽빽한 침대 위에서 함께했던 결과물이야."


지후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사진 속의 작은 점은 생명의 축복이 아니라, 다영이 지후의 발목에 채운 묵직한 쇳덩이처럼 보였다. 다영은 지후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얼어붙은 손을 낚아채듯 잡아 자신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얇은 원피스 너머로 다영의 규칙적인 박동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이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아이가 남편의 눈매를 닮고, 내 입술을 닮아갈 20년, 아니 평생의 시간 동안... 남편은 절대로 이 식탁을 떠나지 못해. 유진이한테 가고 싶다고? 가서 말해봐. '내 아이를 가진 아내를 버리고 너한테 왔다'고. 그 고결한 여자가 참 좋아하겠네, 그치?"


지후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다영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등을 덮어 배 위에 고정하고 있었다.


"이게 남편이 그 여자한테 달려갔던 대가야. 평생을 성실한 남편으로, 다정한 아빠로 박제되어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오빠에게 내리는 마지막 처벌이자 보상이야. 자, 이제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아기 생각해서 영양가 있게 차렸어."


창밖으로 보이는 신도시의 야경은 화려한 보석함 같았지만, 지후에게는 그것이 거대한 공동묘지의 비석들처럼 보였다. 60개월의 할부는 끝났지만, 이제 죽음으로도 상환할 수 없는 '생명'이라는 영겁의 채무가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지후는 다영이 이끄는 대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원목 식탁의 육중한 그림자가 그의 전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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