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의 밤은 화려한 불빛들로 조각나 거실 안으로 침범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은 지후가 그토록 갈망하던 유진의 부드러운 여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롭고, 모든 사물의 윤곽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도려내는 인공의 빛이었다.
지후는 거실 중앙에 버티고 선 육중한 원목 식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파동처럼 퍼졌다. 다영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후가 인천에서 가져온 바깥 공기, 그 비릿한 소금기와 유진의 채취가 묻은 셔츠 깃을 혐오스럽다는 듯 응시하다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남편, 차 좀 마실래? 인천까지 다녀오느라 목이 많이 탔을 텐데."
다영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해서 소름이 돋았다. 지후는 식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 속의 맑은 액체가 파르르 떨렸다.
"너 도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야! 유진이 부모님 식당은 왜 건드려? 그분들이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표절 리포트? 작가 생명을 끊겠다고 협박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지후의 포효에도 다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지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울 같아서, 지후의 분노와 비참함만을 차갑게 반사할 뿐이었다.
"남편, 단어가 너무 상스러워. '협박'이라니. 나는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 '리스크 관리'를 한 것뿐이야. 60개월, 우리가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는 이 집의 할부금처럼, 평온함에도 유지 비용이 발생해. 벌레가 들어오면 약을 치고, 오염된 부분은 도려내야 이 정갈한 풍경이 유지되는 거잖아? 나는 그저 성실하게 내 몫의 청소를 한 것뿐이야."
"방역? 청소? 그게 사람 인생을 짓밟는 일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유진이는... 유진이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내가 간 거야, 내가 못 잊어서 내가 찾아간 거라고!"
"알아. 그래서 남편이 더 나빠."
다영이 처음으로 지후의 말을 끊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서늘한 냉기가 식탁 너머로 스며들었다.
"남편이 그 여자 작업실에서 '여백'이니 '이데아‘ 하는 실체 없는 단어들을 탐닉할 때, 나는 이 집의 밀도를 계산했어. 시부모님 임플란트 비용 입금하고, 명절 때마다 친척들 선물 돌리고, 남편이 회사에서 무시당하지 않게 매일 아침 셔츠를 칼같이 다렸어. 그 여자가 준 건 당장이라도 흩어질 안개지만, 내가 준 건 오빠가 발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야. 근데 오빠는 지금 그 땅을 스스로 파헤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다는 거잖아."
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지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실크 잠옷이 스치는 스산한 소리가 지후의 귓가를 긁었다. 그녀는 지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얼음 송곳이 박히는 것 같은 감각에 지후는 몸을 떨었다.
"이혼하자고 했지? 좋아. 해. 그런데 대가는 치러야지. 남편이 그 여자한테 달려가는 그 순간, 나는 준비해둔 모든 자료를 배포할 거야. 정유진 부모님 식당? 위생법 위반에 무허가 증축, 거기다 탈세 정황까지 이미 구청 담당자 책상 위에 올라가기 직전이야. 평생 일궈온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보는 노인네들 표정이 어떨까?"
다영의 손가락이 지후의 목덜미를 타고 천천히 올라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눈을 마주하게 된 지후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유진이 그림도 마찬가지야. 내가 만든 표절 리포트는 아주 정교해. 전문가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 여자가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게, 아니, 평생 '사기꾼'이라는 낙인이 찍혀 뒷손가락질 받으며 살게 만들어줄게. 남편의 그 고결한 사랑이 한 여자를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똑똑히 지켜보게 해줄게. 감당할 수 있겠어?"
지후는 숨이 막혀왔다. 다영은 단순히 질투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후의 삶 전체를 시스템으로 장악한 설계자였다. 지후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유진의 목이 조여지는 구조. 지후는 자신이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낀 연약한 살점처럼 느껴졌다.
"너... 너 정말 악마구나."
지후의 신음 섞인 말에 다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 나는 가장 현실적인 아내일 뿐이야. 자, 이제 이 지루한 반항은 그만 끝내자. 남편한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거든."
다영은 거실 장식장 위에 놓인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어제 배송 온 짙은 원목 협탁 위에, 유진의 그림보다 더 선명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놓여 있던 것이었다. 다영은 봉투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내 지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흑백의 점과 선들이 뒤엉킨 기묘한 사진. 중앙에 아주 작게, 쌀알보다 더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나 임신했어, 남편."
지후의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것 같았다. 머릿속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되고 오직 사진 속의 그 작은 점만이 망막을 태울 듯 번쩍였다.
"신혼여행 때였나? 남편이 피곤하다며 나를 밀어내기 전, 우리가 그 빽빽한 침대 위에서 함께했던 결과물이야.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 아주 건강하게 잘 자리 잡았다고."
다영은 지후의 얼어붙은 손을 낚아채듯 잡아 자신의 아랫배 위에 강제로 올렸다. 얇은 잠옷 너머로 다영의 규칙적이고 단단한 복부의 박동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것은 생명의 경이로움이 아니라, 지후의 영혼을 짓누르는 거대한 비석의 무게였다.
"이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아이가 남편의 눈매를 닮고, 내 입술을 닮아갈 거야. 20년, 아니 평생의 시간 동안... 남편은 절대로 이 식탁을 떠나지 못해. 유진이한테 가고 싶다고? 가서 말해봐. '내 아이를 가진 아내와 그 아이를 지키려는 아내의 노력을 뒤로하고 너한테 왔다'고. 그 고결한 여자가 참 좋아하겠네, 그치?"
지상을 떠돌던 지후의 모든 이데아가 순식간에 진공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60개월의 할부는 끝났지만, 이제 죽음으로도 상환할 수 없는 '생명'이라는 영겁의 채무가 그의 목줄을 완전히 조여버렸다. 지후는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영은 무릎을 꿇은 지후의 머리를 마치 반려견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 이제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아기 생각해서 영양가 있게 차렸어. 남편이 좋아하는 짙은 색 협탁 위에 우리 아기 신발도 하나 사서 올려두자. 예쁘겠지?"
다영은 지후를 일으켜 세워 식탁 의자에 앉혔다. 지후는 거부할 힘조차 잃은 채, 다영이 밀어 넣는 의자의 무게에 몸을 맡겼다.
거실 중앙의 육중한 원목 식탁 그림자가 지후의 발등을 덮고,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집어삼켰다. 창밖의 신도시는 여전히 찬란한 조명 쇼를 벌이고 있었고, 그 빽빽한 불빛 사이로 지후가 도망칠 구멍은 단 한 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후는 다영이 건네는 은수저를 들었다. 수저 위로 비친 자신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박제된 짐승의 그것처럼 죽어 있었다. 60개월의 시즌이 끝나고, 이제 완납 불가능한 생애(生涯)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옥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