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무채의 요람

by 태화

지후의 하루는 요즘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먼저 향기가 도착했다. 다영이 내려놓고 간 디카페인 커피였다. 커피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고, 지후는 그 향을 맡으며 눈을 떴다. 깨어난다기보다는, 불려 나온다는 쪽에 가까웠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이미 어딘가에서 다 완성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실은 조용했고,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소파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종종 노트나 책이 흩어져 있었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가 앉을 자리도 없이 닦여 있었다. 서재는 더 이상 서재가 아니었다. 책장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나무 냄새가 은은한 아기 침대가 놓였다. 나무는 부드러워 보였고, 둥글게 다듬어져 있었다. 손에 닿으면 상처 하나 남기지 않을 것처럼.


지후는 한 번 그 나무를 만져본 적이 있었다.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 오늘은 조금 일찍 올 수 있어?”


다영은 현관 앞에서 그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중요한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가드 설치 마무리해야 하잖아. 기사님이 오시긴 하는데… 당신이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지후는 잠깐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데, 어딘가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응. 최대한 맞춰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맞춘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후는 점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동료들이 무언가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지후는 잘 듣지 못했다. 대신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무독성’, ‘저소음’, ‘안전 인증’ 같은 단어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관심은 이런 것들로만 채워졌다. 필요해서 찾은 것들이었지만, 계속 보고 있자니 그것들이 자신을 대신 설명하는 말들처럼 느껴졌다.


퇴근길에 서점에 들르는 건 거의 습관이었다. 특별히 책을 사는 건 아니었고, 그냥 한 바퀴 도는 정도였다. 그날도 그랬다. 신간 코너를 지나가다가,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유진의 책이 있었다.


표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지후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는데, 이상하게 그 한 걸음이 어려웠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막상 움직이려 하면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서점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교수님. 이번엔 조금 다른 걸 해보려고요.”


지후는 고개를 들었다. 유진이었다. 예전보다 살이 빠진 것 같았고, 머리도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은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더 또렷해졌을지도 몰랐다.


“‘박제된 도시’로요. 숨 쉴 틈이 없는 공간들 있잖아요.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은 것들.”


유진은 통화를 하며 그대로 서점을 나갔다. 지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박제된 도시’라는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은 낮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아기 침대 주변이 조금 더 복잡해져 있었다. 설명서와 공구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고, 다영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왔어? 이것 좀 봐.”


다영이 환하게 웃었다.


“가드 설치하니까 훨씬 안정적이지 않아? 이제 아기가 여기서 자게 될 거야.”


지후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넣어 안쪽을 만져봤다. 부드러웠다. 다치지 않도록 잘 만들어진 구조였다. 그런데 손을 빼는 순간, 그 간격이 생각보다 좁다는 걸 느꼈다. 들어가는 건 쉬운데, 나오는 건 조금 어려운 느낌.


“왜 그래? 피곤해 보여.”


다영이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을 재듯이, 익숙한 동작이었다.


“아니야. 그냥 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지후는 웃어 보였다.


저녁 식탁은 늘 그렇듯 단정했다. 반찬의 위치도, 그릇의 간격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지후는 젓가락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밥을 입에 넣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 다영이 먼저 잠들고, 지후는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아기 침대 옆에 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침대의 윤곽을 드러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것이 침대인지 다른 무엇인지 잠깐 헷갈렸다.


지후는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냈다. 오래된 것이었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안쪽 프레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 아주 작게 선을 하나 그었다.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분명히 남는 선이었다.

연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 순간, 안방에서 다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


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지금 갈게.”


그는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그 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희미하게 느껴졌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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