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선 계절

by 태화

신도시의 밤은 비명조차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매끄러운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지후는 거실 한복판, 다영이 '가족의 골조'라 부르던 육중한 원목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식탁 상판은 지독하게 닦여 있어, 조명 빛을 반사하며 지후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그 위에는 다영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차려놓은 야식이 놓여 있었다. 껍질을 완벽하게 깎아내어 하얀 속살만 남은 참외, 그리고 티끌 하나 없는 유리잔에 담긴 따뜻한 우유.


지후는 참외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영의 칼날은 참외의 거친 질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란 껍질이라는 과거를 거세당한 채, 다영이 설계한 접시라는 평면 위에 박제되어 있었다. 지후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남편, 우유 식기 전에 마셔. 아기 태동이 예사롭지 않아. 당신 목소리 듣고 싶나 봐."


안방에서 나온 다영이 지후의 어깨 위로 부드러운 가디건을 걸쳐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섬세했고, 옷감에서는 다영이 고집하는 특정 브랜드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이제 지후의 폐포 깊숙이 침투하여, 그가 유진의 작업실에서 맡았던 그 눅눅하고 자유로운 기름 냄새를 완전히 소독해버린 상태였다.

지후는 기계적으로 우유 잔을 들었다. 액체는 식도를 타고 미지근하게 넘어갔다. 그것은 맛이라기보다 '관리'의 감각이었다. 다영은 지후의 영양 상태, 수면 시간, 심지어는 그가 하루에 내뱉는 단어의 총량까지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분류했다. 지후의 삶은 이제 다영이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속에 입력된 하나의 변수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 지후는 다영이 현관문 앞에 정렬해둔 구두를 신고 출근길에 올랐다. 구두는 광택이 지나쳐 지후가 내딛는 보도블록의 틈새까지 비추고 있었다. 지후는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은 다영이 어제 저녁 깔끔하게 정리해준 덕분에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거칠거나 모난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후의 신체는 다영의 손길 아래에서 서서히 '인간'이 아닌 '전시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도 지후는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다영은 이미 지후의 점심 메뉴를 도시락으로 싸주었고, 오후에 마실 티백까지 서류 가방 안에 순서대로 배치해두었다. 지후는 그저 다영이 그어놓은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정교한 태엽 인형이었다.


"이 대리, 요즘 일처리가 너무 훌륭해. 다영씨가 많이 내조해주나봐."

부장의 칭찬에 지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라, 다영이 거울 앞에서 수없이 연습시켰던 '사회적으로 무결한 표정'의 출력값에 가까웠다. 지후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증발하고 있음을 느꼈다. 유진을 향했던 갈망,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 혹은 다영의 통제에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분노조차도 이제는 희미한 잡음처럼 느껴졌다. 60개월의 할부라는 명목으로 저당 잡힌 그의 영혼은, 이제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파산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퇴근길, 지후는 습관적으로 서점에 들렀다. 신간 코너에는 유진의 새로운 단행본이 깔려 있었다. 책의 표지는 지후가 전시회에서 보았던 그 그림, 노을 지는 교실 안의 소년과 소녀였다. 지후는 책장을 넘기려 손을 뻗었지만, 이내 멈췄다. 그의 손끝이 책 표지에 닿는 순간, 다영이 설치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센서가 작동하여 '경고음'을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후는 책 대신 다영이 리스트에 적어준 '임산부용 유기농 견과류'를 사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카트를 밀며 진열대 사이를 걷는 지후의 발걸음은 유령처럼 가벼웠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존재의 부피를 잃어버린 채, 다영이 채워 넣은 의무와 책임이라는 모래 주머니들만이 그를 바닥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다영은 거실 중앙의 원목 식탁 위에 초음파 사진을 액자에 넣어 장식하고 있었다. 60개월의 할부금이 끝나가는 시점에 찾아온 그 '작은 점'은, 이제 지후의 서재를 아이 방으로 바꾸고 지후의 소장품들을 중고 거래 사이트로 몰아내는 명분이 되었다.


"남편, 서재 정리 다 했어. 남편이 보던 낡은 소설책들은 먼지가 너무 많아서 아기한테 안 좋대. 내가 창고에 넣어뒀으니까 서운해하지 마."

다영은 지후의 넥타이를 풀어주며 속삭였다. 지후는 자신의 세계가 한 칸씩 철거되는 소리를 들었다. 소설가의 꿈이 담긴 낡은 노트들, 유진과의 추억이 묻은 오래된 티켓들, 그리고 홀로 생각에 잠기던 그 작은 책상까지. 다영은 '위생'과 '안전'이라는 이름의 불도저로 지후의 영토를 밀어버리고 그 위에 '가족'이라는 견고한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잘했어. 당신이 알아서 잘 치웠겠지."


지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타인의 목소리 같았다. 지후는 거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도시의 아파트들은 일제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수만 개의 창문 속에는 지후와 같은 '박제된 남편들'이 다영과 같은 '설계자'들이 차려준 완벽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다영은 지후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오늘 저녁은 붉은 기가 전혀 없는, 아주 잘 익은 생선 요리였다. 다영은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내어 지후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지후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남편, 내일은 아기 침대 위치 다시 잡아야 해. 풍수지리상 이쪽이 머리 방향이어야 한다네. 남편이 힘 좀 써줘."


"응, 알았어."


지후는 대답과 동시에 식탁 밑으로 자신의 발을 보았다. 다영이 고른 실내화가 그의 발을 꼭 죄고 있었다. 지후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지만, 그 좁은 공간 속에서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60개월의 할부는 끝났지만, 이제 '대물림되는 할부'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후의 삶은 더욱 빽빽해질 것이다. 학군지를 고민하고, 학원비를 벌고, 다영이 정해준 '표준적인 가장'의 연극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진이라는 여백은 녹슨 못처럼 가슴 한구석에 박혀 서서히 문드러져 가겠지만, 지후는 결코 그것을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밤이 깊어 지후는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켰다. 무언가 적고 싶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그러나 하얀 화면 위에 커서만이 깜빡일 뿐이었다. 지후는 깨달았다. 그는 이제 '0'조차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다영이 그의 모든 문장을 '가족'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이다.


지후는 노트북을 닫았다.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다영이 고른 거실 조명 아래에서 눈부시게 매끄러웠다. 주름 하나, 그늘 하나 없는, 완벽하게 관리된 슬픔의 안색이었다.

"남편, 안 자고 뭐 해?"


안방 문틈으로 다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신도시의 빛은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식탁의 모서리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후는 그 식탁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더 이상의 저항도, 더 이상의 여백도 없었다. 오직 다영이 설계한 박제된 계절의 침묵만이 지후의 전 생애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었다. 지후는 그렇게, 자신이 지불해야 할 영겁의 이자를 체념하듯 받아들이며 어둠 속으로 완전히 소멸해갔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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