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쪽으로만 걷는다

by 태화

신혼집의 아침은 기계적인 평온함으로 시작되었다. 정오를 향해 가는 빛은 유진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부드러운 여백의 빛과 달랐다.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매끄럽게 닦인 고층 아파트의 통창을 통과한, 날카롭고 규격화된 인공의 빛이었다. 빛은 집 안의 모든 물건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곳이 유예된 꿈이 아닌 지독한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후는 거실로 나와 어김없이 그 자리에 놓인 원목 식탁을 마주했다. 다영은 이미 일어나 정갈하게 아침을 차려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국과 윤기가 흐르는 쌀밥, 정갈하게 놓인 밑반찬들. 그 완벽한 가정의 풍경 속에서 지후는 자신이 이 식탁의 다리처럼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린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잠은 좀 잘 잤어? 어제 꿈이라도 꾼 건지 계속 뒤척이더라."


다영이 노릇하게 구운 생선을 식탁 정중앙에 놓으며 물었다. 지후는 젓가락을 들다 멈칫했다. 꿈속에서 쏟아부었던 붉은 물감의 감촉이 여전히 손끝에 젖어 있는 듯했다.


"응, 그냥... 좀 피곤했나 봐."


"피곤해도 아침은 챙겨 먹어야지. 오늘은 안방 협탁 배송 올 거야. 남편이 좋아하는 짙은 색으로 맞췄으니까 보면 좋아할 거야. 침대 옆에 두면 딱일걸."


다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후의 삶이라는 빈 공간을 채우는 못질 소리 같았다. 그녀는 지후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새로운 가구, 새로운 가전, 빈틈없는 일정들로 그의 일상을 빽빽하게 메워나갔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명암'이었다. 유진이 그토록 지워내려 했던 답답한 선들이, 이제 다영의 손에 의해 지후의 삶 위에 겹겹이 쳐지고 있었다.


회사에 출근한 지후는 습관적으로 유진과 함께 작업했던 콘티 파일을 열었다. 이제는 인쇄소로 넘어가 수정조차 불가능한 '완성본'이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여전히 투명한 여백 속에 머물며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지후는 더 이상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 눈동자들이 자신의 비겁함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후 씨, 이번 작품 대박 조짐 보이던데? 유진 작가님 그림체가 확 바뀌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독자들 반응도 벌써 오더라고."


동료가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근데 작가님은 어디 가셨대? 후속 작업 제안드리려고 연락했는데 통 안 받으시네."


"어... 지방으로 내려가신다고 들었어요. 당분간 쉬신다고."


"아, 그래요? 아쉽네. 이 분위기 이어서 바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지후 씨는 좋겠어, 이런 분이랑 작업해서."

지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우스를 클릭해 창을 닫았다. 유진이 남긴 쪽지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지는 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지 말라고 켜주는 거야.' 유진은 그를 어둠에서 끌어내 현실로 돌려보냈지만, 지후에게 현실은 길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길 끝에 있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유진의 쪽지를 꺼내 보려다 손을 멈췄다. 어제 퇴근길, 다영이 그의 코트 먼지를 털어주며 슬쩍 주머니 근처를 살피던 서늘한 손길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다영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후가 스스로 그것을 버릴 때까지, 그 비겁함을 완성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리라.


퇴근길, 지후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긁자 휴대폰으로 결제 문자가 날아왔다. [60개월 중 1회차 상환 완료]. 숫자는 정직했다. 그의 자유가 매달 조금씩 깎여 나갈 것임을 선고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다영이 새로 온 협탁 위에 그들의 웨딩 사진 액자를 올려두고 있었다. 사진 속 지후는 턱시도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진의 그림 속 인물들이 보여주던 그 처연한 진심 대신, 사회적 요구에 의해 잘 정돈된 마스크를 쓴 채였다.


"남편, 이것 봐. 협탁이랑 액자랑 찰떡이지? 집안 분위기가 확 살잖아."


"어... 정말 그러네. 잘 골랐다."


"그치? 이제 정말 우리 집 같아. 하나하나 채워가는 재미가 이런 건가 봐."


지후는 다영의 옆에 서서 자신의 웃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것은 지후가 아니라, 다영이 60개월 동안 갚아나가야 할 '성실한 남편'이라는 상품의 견본처럼 보였다.


그날 밤, 지후는 거실 식탁에 홀로 앉아 노트북을 켰다. 다영은 안방에서 잠든 듯했다. 그는 새 문서 창을 열었다. 제목은 없었다. 그는 유진이 가르쳐준 대로, 무언가를 쓰기보다 먼저 화면을 가득 채운 하얀 여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백색의 공간 속에서 유진의 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려던 찰나,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안 자고 뭐 해? 불도 안 켜고."


"아, 그냥... 잠이 안 와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주말에 우리 아기 용품점 가기로 한 거 잊었어? 이제 우리 아기 슬슬 준비해야지. 응?"


다영은 지후의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얇은 셔츠 너머로 눅눅하게 배어들었다. 다영의 턱이 지후의 어깨에 얹히자,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것은 다정한 권유라기보다,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부드러운 협박에 가까웠다.


"무슨 글 써? 나한테도 좀 보여주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낙서야."


지후는 천천히 자판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하얀 화면을 그대로 둔 채 노트북 전원을 껐다. 검게 변한 화면 위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이 비쳤다. 그는 이제 안다. 자신은 평생 이 여백을 그리워하겠지만, 결국 다영이 차려준 따뜻한 밥상 위에서 서서히 질식해갈 것임을.


"이제 들어와. 늦었어."


지후는 불을 끄고 어둠 속을 걸어 안방으로 향했다. 거실 중앙에 버티고 선 원목 식탁의 육중한 그림자가 그의 뒤꿈치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60개월의 할부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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