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내 앞에 다가왔다.

by 태화

첫사랑이 내 앞에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막막한 공간이 서 있다. 둘로 나누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다시 둘로 갈라 노트북 화면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수 없이 반복하여 필요한 만큼 말이 오갔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미 몇 번이고 상대의 가장자리를 휘익 스치고 돌아왔다. 끝내 닿지 않았다는 실상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처럼 남았다.


지후는 종종 시간을 헷갈렸다. 지금을 걷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지나간 장면을 살고 있는 건지.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학교 앞 신호등에서, 하이얀 눈꽃 위에서 자신이 어느 쪽을 향해 서 있는지 자꾸만 확인했다.


첫 미팅 이후, 유진과의 만남은 자연스레 몇 번 더 이어졌다. 이유는 늘 명확했다. 콘티 수정, 색감 조정, 표지 후보 압축. 일정은 번번이 어긋나다 결국 일요일을 택했다. 주말이라는 안온한 외피를 스스로 찢고 나가는 일은 늘 불쾌한 뒷맛을 남긴다. 지후는 휴일의 업무를 생리적으로 혐오해왔음에도 어째서인지 오늘은 서둘러 나가고 싶다는 묘한 부력에 휩싸였다. 참 기이한 날이다.


작가에게 영감은 입금 알림과 같다고 유진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없으면 초조하고, 하루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또 금세 써버리게 되는 것. 통장 잔고를 확인하듯 마음속을 더듬어본다. 오늘은 어쩐지 잔고가 조금은 두둑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유진이 파일을 분주히 열었다. 화면 위로 번져가는 그림들을 마주하자 지후는 고개를 앞으로 더 당겨 집중했다. 자신이 기억하던 유진의 그림체와 다른 질감을 띠고 있었다. 학창시절, 공책 귀퉁이를 채우던 그림들은 선이 많고 과했다. 마치 모든 감정을 닻을 내려 붙잡아두려는 사람처럼. 얼굴 하나에도 명암의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독창적이지만 공격적이었고, 선명하면서도 스스로를 감추기 급급한 바쁜 색채.


그러나 지금의 그림은 달랐다. 투명해졌다. 날카로운 선은 유순하게 깎였고, 색은 한발 물러서 여백을 내어주었다. 붙잡는 대신 눅눅하게 고여 오래 눈길을 붙잡았다. 웅변하기보다 침잠함으로써 또렷해지는 마음들. 겹쳐지고 지워진 선들 앞에서 유진이 통과해온 시간의 밀도를 짐작하게 했다. 유진은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화면의 조도를 슬쩍 낮췄다. 자신의 쌩얼을 들킨 아이 같은 조심스러운 움직이었다.


“너무 펑 비어보이나? 선을 줄이니 그림이 좀 헐거워진 것 같기도 하고.”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꽉 차 있는 기분이야. 예전엔 네 그림을 보면 숨이 좀 찼거든. 네가 담아둔 감정들이 너무 빽빽해서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까.”


“사귈 때는 내 그림이 최고라 했으면서.”


유진이 가볍게 받아쳤다.


“음.. 그때는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맹목적인 팬심 반, 헤어지면 보복당할까봐 무서워서 거짓 반?”


“아, 웃겨 그럼 지금은?”


유진이 손톱 끝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지금? 음.. 보복할 기력이 없어 보여서 진심만 한 90%”


“나머지 10%는?”


“너한테 밥 사달라고 해야 해서 남겨둔 립서비스.”


“하하하.”


유진의 웃음에 지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참나, 여전하네.”


지후는 묵혀두었던 기억을 꺼내 올렸다. 예전부터 지후의 별거 아닌 말과 썰렁한 농담은 주변 사람들을 정적 속에 휩싸이게 했다. 하지만 유진만은 늘 예외 없이 꺄르르 웃어주곤 했다. 자신의 엉뚱한 코드까지 무조건적으로 웃어주던 그녀만의 애정표현.


“나이가 든 건지, 아니면 성장한 건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모든 명암을 다 채워 넣어야만 안심이 됐거든. 내가 이만큼이나 애쓰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내가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선들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걸.”


“그래서 좀 지워봤어. 나를 괴롭히는 것들부터 하나씩.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그림 속 인물들이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더라. 나처럼 말이야.”


지후는 유진의 언어가 자신이 느낀 마음의 잔고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채워서 두둑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털어내고 남은 결이 비로소 제 두께를 드러내는 상태. 그는 왜인지 흐뭇해하며 이전 컷을 넘겼다.


“이 눈 처리.. 고등학교 때 네가 시험지 뒤에 그렸던 거랑 비슷하네.”


“아 그거? 그때는 무조건 크게 그려야 감정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항상 슬프거나 화가 있던 애들만 있었지.”


“너가 그게 좋다며. ‘이상하게 진심’ 같다고.”


교실 창가, 낡은 책상, 종 치기 직전의 분주한 학생들의 소음이 모노드라마처럼 지나갔다. 지후는 다음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색감 조금 더 빼는 건 어때?”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수정했다.

같은 업계, 같은 파일, 같은 언어. 정해진 목적이 있는 만남과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는 시간. 일이 우선이고 과거는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자리.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이 웃음을 터뜨리자 마음이라는 건 참으로 얄궃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자물쇠로 견고하게 닫아 걸었다고 생각한 서랍 틈새로 낡은 추억이 냄새처럼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고작 픽셀로 이루어진 화면 주제에 왜 그토록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후 네 번째 미팅이 끝나갈 무렵 유진이 툭 하고 포트폴리오를 덮으며 말했다.


“이 작품 참고로 보면 좋을 영화가 있는데...”


지후는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말로 설명하면 좀 애매해서... 분위기가 중요하거든.”


유진이 망설이다 덧붙였다.


“혹시 같이 보러 갈래?”


잠깐의 정적. 지후의 머릿속에 다영이 스쳤다. 저녁 식탁에서 결혼식장 얘기를 하던 모습, 날짜를 맞추려 캘린더를 넘기는 손. 일련의 필름은 단단하게 착색된 현재진행형이었다.


“....”


지후는 입안에 작은 돌멩이를 굴리듯 웅얼거렸다. 누군가에게 대답하기보다 자신 안의 다급한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무력한 독백이었다.


“그러니까...”


여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결혼이란 꽉 찬 액자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후. 다시금 헐거워진 과거의 도면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변명.


“업무 때문이면... 괜찮지.”


영화는 평일 저녁에 찾았다. 회사에서 불과 두 정거장 거리에 뻔한 멀티플렉스를 두고도 굳이 지하철로 반대편 끝에 있는 낡은 예술영화관을 찾아갔다. 평일 저녁이라 좌석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상영관은 눅눅한 팝콘 냄새와 오래된 카펫 냄새가 섞여났다. 영화가 시작되자 스크린 위로 무수한 대사가 쏟아지고 매혹적인 색감이 흘러넘쳤다. 분위기에 젖어든 관객들 속 지후는 이질감만 느껴졌다. 영화에 집중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옆자리를 의식했다.


진득한 어둠 속에서 유진의 웃는 표정, 집중하는 표정, 놀라는 표정이 교차했다. 은은한 화면 빛이 유진의 옆굴을 비추자 스크린을 보는 건지 유진을 보는 건지 헷갈려 마음이 마구 뒤엉켰다. 그러다 문득 유진과 눈이 마주쳤을 때, 지후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우 영화를 보는 것뿐인데 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는건가. 정말 기이한 날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스크린의 불빛이 꺼진 후에도 둘은 그 자리에 멍하니 머물렀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직원이 다가와 불을 켜고 나가달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둘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영화관을 나서며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밀도가 높아서 숨이 가빠지네.”


지후의 대답은 영화에 대한 것인지, 아님 자신들의 걷잡을 수 없이 빽빽해진 감정에 대한 것인지 모호했다.

“그래서 좋았어. 어디서부터 너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헷갈리게.”


유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침표처럼 깔끔한 웃음기였으나 지후의 마음속에선 잉크가 번져나가듯 걷잡을 수 업는 감정이 자꾸만 돋아나고 있었다. 극장을 나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길어지는 대화 안에 일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었다. 비어 있던 시간들이 조심스럽게 메워졌다. 누구는 여전히 솔로였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척 바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후는 받지 않으려다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회사 근처. 미팅이 조금 길어졌어.”


“아, 그래.”


다영은 더 묻지 않았다.


유진이라는 이름은 오래전에 들었다. 처음은 우연처럼, 두 번째는 설명처럼, 세 번째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이름이라는 건 대게 그렇다. 부르는 이의 숨을 바꾸어 놓는다. 지후가 그 이름을 부를 때도 그랬다. 문장 끝이 낮아지고, 말과 말 사이에 쓸데없는 공백이 생겼다. 조심해진다는 것, 그리고 아주 약간 느려진다는 것도.


질투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모자랐다. 질투는 대게 현재형이어야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이름 하나쯤은 있으니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진이 지후에게 과거라는 것. 그리고 과거가 항상 끝난 시제가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다영은 묻지 않았다. 지금 지후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을지를 알고 싶었으니까.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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