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지하철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각자의 공간에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후에게는 평소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바로 다영의 빈자리 때문이었다. 어깨를 맞대고 서서, 출근길의 사소한 농담과 계획을 주고받던 자리. 이제는 “먼저 갈게”라는 짧은 메시지만 남긴 채 먼지 속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지후는 그 빈칸에서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쪽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머릿속에는 지우고 싶은 장면과 지우지 못한 감정이 뒤엉켰다. 사람들의 발걸음과 대화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자신만 고립된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다영은 이미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잔을 들고 다가가며 지후가 말을 붙였다.
“좋은 아침.”
다영은 고개만 살짝 들어 미소 지었다. 살며시 둥글어진 눈빛 속에는 가라앉지 않은 어제의 대화가 남아 있었다.
“고마워.”
평소와 다름없는 말 뒤에 숨겨진 긴장과 주저함이 미묘하게 느껴졌다.
“어제… 잘 들어갔어?”
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말끝에는 망설임이 섞였다. 다영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응. 너는?”
“나도.”
솔직한 대답 뒤에는 더 이상 붙일 말이 없었다. 지후는 그 단절된 공기 속에서, 어제의 대화와 오늘 아침 사이의 간극을 느꼈다.
지후는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켰지만 화면 속 글자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일 알림이 몇 번이나 울렸고, 일정표 한쪽에 표시된 ‘오전 회의’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단어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부담이었다.
"하.. 미치겠네."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더 보태고 싶은 말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어제의 끝맺음이 오늘을 규정해버린 것 같았다. 다영과 나누던 대화의 여운은 해소되지 않은 채 가슴 어딘가에 먼지처럼 쌓여있었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며 숫자와 문장을 확인하려 했지만, 작은 잡음들이 훼방을 놓았다. 다영의 짧은 대답, 지하철의 빈자리, “먼저 갈게”라는 메시지. 사소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며 이유 없는 짜증으로 변해갔다.
"일은 일이야, 일하자 일."
회의실로 이동하는 동안 지후는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일은 일이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회의실 문 앞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오히려 귀에 거슬렸다. 자신만 아직 어제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회의 시간, 팀장님은 정유진 작가의 프로젝트를 화면에 띄웠다.
“정유진 작가님, 다음 주 미팅 잡혔습니다. 지후 씨가 주 담당으로.”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이미 미팅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포트폴리오 속 그림들은 날카롭고 생생했다. 고등학교 미술실에서 보던 붓질이 어렴풋이 보였다. 불완전한 현실을 순수한 형태로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묘한 불편함과 질문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이게 정말 완벽한 걸까. 아니면 내가 완벽하다고 믿고 싶은 걸까.’
화면에 정유진 작가의 작업들이 하나씩 넘어갔다. 다영은 발표를 듣는 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지후 쪽을 힐끔거렸다. 그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고, 화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단순히 자료를 확인하는 얼굴이라기엔, 너무 오래 한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지후는 자판을 움직이지도, 메모를 하지도 않았다. 심연에 잠겨 이미지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어갔다. 설명이 끝난 뒤에도 시선을 쉽게 떼지 못했다. 화면 속 그림의 질감과 구도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다영은 그 묵언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왜 저렇게 보고 있지?’
다영은 다시 화면을 보려 했지만 시선은 자꾸 지후에게로 돌아갔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 더 꼬여버린 기분이었다.
팀장님은 작품의 콘셉트와 일정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후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 무심함이 다영에게는 집중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결심을 속으로 굴리는 얼굴 같았다.
다영은 문득 아침의 짧은 인사가 떠올랐다. “고마워.” 그 말에 담긴 어제의 여운, 그리고 오늘 지하철에서 느꼈을 거리감. 그 모든 감정이 화면 속 낯선 작가의 이름과 겹쳐졌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 안쪽에서 서서히 불안이 부풀어 올랐다.
정유진 작가의 작품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갈 때, 다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명을 듣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되새겨졌다.
‘왜 하필 저 프로젝트야.’
‘왜 저 표정이지.’
다영의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이미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 감정을 그냥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자 다들 수고했고, 이번 프로젝트도 화이팅해봅시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의자를 밀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영은 노트를 덮으면서도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얼굴은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지금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지후는 팀장님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다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이 다영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까 그 프로젝트.”
다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주변에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왜?”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냥.”
다영은 말을 삼켰다. 질문을 그대로 꺼내기엔 아직 이르다고 느꼈다. 괜히 예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영은 지후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폈다. 회의 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호수같은 무심한 표정이 다영을 더 불안하게 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짧은 길 동안, 둘은 몇 마디를 주고받았지만 모두 겉돌았다. 다영은 웃음을 섞어 농담처럼 말했고, 지후는 그에 맞춰 반응했다. 아무 문제 없는 척, 평소처럼. 하지만 다영의 속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 작품, 그걸 바라보던 지후의 눈빛.
자리에 도착하자 다영은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메일을 처리했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몇 분을 버텼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다 지후가 무심하게 말했다.
“다음 주 정유진 작가랑 미팅 잡혀 있는데, 계획서 오늘 중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
그 말이 결정타가 됐다.
다영은 천천히 의자를 돌려 지후를 바라봤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지후야.”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너, 아까 회의 때… 어땠어?”
짧은 침묵.
“뭘?”
그 한마디에, 다영 안에서 쌓아 올린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정유진 작가 작품.”
다영의 말이 빨라졌다.
"뭐.. 그냥 프로젝트 본건지."
“끝이야?”
다영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봤다는 말로 끝낼 거야?”
지후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여전하더라. 그 사람 스타일은…”
“뭔가 잡히지 않는 거야?”
다영은 팔짱을 끼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지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사무실 한쪽에서 키보드를 치던 손들이 하나둘 멈췄다.
“야, 분위기 왜 저래?”
“쟤네 내년에 결혼 아니야?”
“그러게… 싸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작은 소곤거림이 공기처럼 퍼졌다. 지후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다영아, 그런 의미는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영의 눈이 지후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어제 네가 뭐라 그랬는지 기억 안 나? 다른 계산도 조건도 필요 없었다며. 오직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만 만났다며.”
말 위로 다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분노와 불안이 섞인 동요였다.
“…그땐 그랬지.”
지후가 인정하듯 말했다.
“근데 그게 지금이랑 같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뭐가 달라졌는데?”
다영이 한 발짝 다가왔다. 숨 쉴 틈 없는 거리였다.
“그 사람 그림 보면서 첫사랑 생각났지? 정유진 이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지?”
지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림 하나로 충분했다.
“하.”
다영이 짧게 웃었다.
“역시.”
사무실 뒤쪽에서 속삭임이 튀어나왔다.
“와… 이건 진짜 큰 싸움 같은데.”
“결혼 앞두고 첫사랑이면… 답 나오네.”
다영은 일부러 더 분명하게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감정은 문장 사이로 새어 나왔다.
“네가 좋아했던 건 이상 같은 게 아니었어.”
"....."
“그림도 아니고, 사람이었어. 정유진. 네가 평범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떠올리던 사람.”
지후가 고개를 저었다.
“도망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정리하려는 거야.”
“정리?”
다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걸 왜 지금 해. 왜 하필 우리 결혼 앞두고야?”
지후의 어깨가 굳었다. 다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섰다. 참고, 또 참고, 결국 터뜨리는 숨이었다.
“좋아. 미팅 가.”
그녀가 말했다.
“가서 그대로 보고 와.”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다영이 단어 하나하나를 씹듯 말했다.
“지금의 사랑인지, 아니면 그냥 네가 미화해 온 옛날 첫사랑인지.”
다영이 문 쪽으로 걸어가 나갔다. 지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 안에는 다시 키보드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방금 전의 공기가 사라졌다고는 믿지 못했다.
***
그날 저녁, 퇴근 후 두 사람은 커피숍에 들렀다. 오후처럼 무거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공기 중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아까는 흥분해서 미안해.”
“아니야, 이해해.”
다영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사실 난… 네 과거가 궁금한 건 아니야.”
“그럼?”
“네가 지금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할 뿐이야. 정유진이라는 렌즈를 벗고, 날 그대로 보는지가.”
지후는 커피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미팅 후에 나한테 말해 줘. 그 사람이 정말 ‘완벽한 이상형’인지, 아니면 그냥… 옛날 친구인지.”
다영이 살짝 웃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안쪽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지후는 다음 주 미팅을 앞두고 걱정이 늘었다. 유진을 다시 마주할 때, 과거의 이데아가 무너질지, 아니면 더 단단해질지.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도, 다영의 말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대로 보는 거.’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향한 다음 걸음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