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초입 : 그때, 우리는

미술실의 오후

by 태화

창밖에 걸린 겨울 도시는 잿빛이다.


지후는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다. 새로 들어온 원고를 넘기며 한숨을 내뱉는다. 화면에 뜬 '새로운 작품 검토 완료' 알림은 이미 열두 개째 쌓여있었다.


읽고 싶지 않은 글들이었다. 손이 가닿을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는 문장들. 문학이 가진 가장 잔인한 미덕은 중독성이다.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요구하고, 독자를 인질로 삼는다. 그러나 이 글의 그럴듯한 단어들은 같은 문장에 나열됬으나 함께 움직이지 못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에게 피로만 쌓여갔다.


"하아, 이게 마지막 원고인가... 이데아 첫사랑? 제목은 좀 특이하네."


마지막 원고는 제목부터 눈에 걸렸다. 『이데아 첫사랑』 로맨스 판타지라기엔 지나치게 철학적인 작명. 첫 장부터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등장했다. 첫사랑은 닿을 수 없는 원형이며, 현실의 연인들은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서술.


'현실의 사랑은 모두 불완전하고, 진짜 사랑은 기억 속에 이데아로만 존재한다.'


원고 속 주인공은 첫사랑을 이상화하며 현재 연애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다. 말 끝에서 그의 왼쪽 밑입술이 이빨에 깊게 눌렸다. 마우스 휠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문장은 가슴 안쪽에 생채기를 냈다.


‘그 소녀의 미소는 불완전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완벽해졌다. 이데아처럼.‘

지후는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흩어진 시선은 창가로 모였다. 창 위로 첫사랑이 떠올랐다. 유진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건 졸업식 날, 눈 내리던 교문 앞. 각자의 꿈은 진학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떼어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서로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꿈이 너무 커서였겠지."


빙원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녹아오르듯 되살아났다. 여전히 같은 장면에 설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날들. 어느 순간 같은 계절 속 다른 날씨를 사는 서로를 봤다. 그 어긋남은 차곡차곡 마음을 깎아냈다. 물리적인 거리는 지도로 셀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잡은 손을 놓았다.


"같이 가지 못해 미안해."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던 그녀였다. 그 후로 10년. 추억은 끊겼지만,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출판사 생활 5년 차, 매일 수십 편의 원고를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이데아'를 손에 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가는 길에서는... 꼭 행복해."


네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지후는 커피 잔을 들다 말고 눈을 감았다. 원고 페이지가 스스로 과거로 넘기는 듯했다. 기억은 늘 순서를 무시한 채 찾아온다.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 냄새가 뒤섞인 좁은 미술실. 유난히 고요했던 한 날.


눈 앞에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빨리 가, 버스 놓치겠다!"

"잠깐만, 가방 좀 정리하고!"


하교하는 발걸음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흩어졌다. 복도에는 발자국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엉켰고, 교실들은 숨을 헐떡였다.


"미술실은 멀어서 싫다니까."


그 소란의 끝, 복도 가장 안쪽에 미술실이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쪽은 마치 다른 계절처럼 조용했다.


"후...."


지후는 문 앞에서 주저했다. 자신의 임무는 담임이 시킨 미술용품 세트 찾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그는 늘 목적과 다른 것들을 먼저 발견하곤 했다. 사소한 풍경, 말없이 걸터앉아 있는 사람, 혹은 종이에 번진 색 같은 것들.


"오늘도 남아있네."


지후는 창문 너머로 안을 살짝 훔쳐보았다. 창가 쪽 끝자리에서,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깨를 살짝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고 앉아있는 모습. 햇빛이 교실 창을 비스듬히 가르며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손등 위에 얇은 금색 선이 그려졌다. 오똑한 코와 겨울을 닮은 피부가 반짝였다. 한지후가 나중에 수없이 떠올리게 되는 이 장면은 사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난 철제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 미안. 사람 있는 줄 몰랐네.”

지후의 말은 단순한 사과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치 운명을 예감한 인사의 변주처럼 떠올렸다. 한마디로 자신이 어떤 세계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믿고 싶었던 것처럼.


유진은 잠시 지후를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들어와도 돼.”

그녀의 목소리는 서리 낀 새벽처럼 낮았다. 문장 사이 남는 공백은 설원처럼 길었다. 아직 햇살이 닿지 않은 겨울이었다.


유진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후는 미술용품을 찾기 위해 교실 뒤편 서랍을 뒤적였다. 하지만 두 눈은 자꾸만 그녀의 등 뒤를 향했다.


종이 위에는 겨울의 학교 앞 풍경이 있었다. 푸른색과 회색, 약간의 흰색.

“잘 그린다.”

입밖으로 나온 말이 지후 스스로에게도 낯설었다. 평소라면 이런 말은 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진은 멈칫하며 눈길을 떼어냈다.


“아직 덜 그렸는데.”

당황한 나머지 지후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그래도… 이미 느낌은 있잖아.”

분위기를 채우기 위해 던진 어색한 말.


“느낌 같은 거, 믿는 편이야?”

지후는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서랍 손잡이를 쥔 채 멈췄다. 질문의 대상이 그림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 나중에 보면 알겠지.”

그가 택한 답은 시간에게 떠넘기는 말이었다.


훗날 지후는 이 날을 자주 떠올렸다. 아마 모든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리라. 한 사람을 ‘지금의 얼굴’로 기억하는 대신, 언젠가 완성될 얼굴로 믿어버린 순간. 현실에 소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소녀를 닮은 형상을 집요하게 빚고 있던 날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정 위에 덧씌운 이상(理想)으로.


미술용품을 찾고,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채 교실을 떠났다. 미술실에 머문 시간은 몇 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억은 길이를 선택하는데 현실을 참조하지 않는다. 그 몇 분은 오래도록 사랑의 기원으로 반복 재생되었다.


"뭐야... 언제 이렇게 눈이 내린거지?"


하늘이 말을 접는 소리에 사색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뜨니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이얀 눈꽃이 접힌 시간처럼 차곡히 쌓였다. 지후는 원고 검토를 서둘러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밖은 생각보다 더 성급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멈춰 서 하얀 세상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유년기며 청소년기의 기억들은 대게 미화되어 추억으로 남는다. 시간은 모서리를 깎고, 감정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감정은 이미 추억이 되었고, 추억은 오래전에 현재의 자리를 떠났다. 그녀 없이 보낸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아무 저항 없이 과거형으로 굳어 있었다. 다시 살아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생각이 뜻대로 멈추지 않았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늘 그랬다. 하얀 입김이 흩어지던 길 위에서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으로 무장한 유진을 떠올렸다. 추위 때문에 붉어진 코와 볼이 이상하게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던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손을 잡고, 거리 끝에서 붕어빵을 사 먹고, 다시 손끝이 스치고 웃던 일들. 웃음이 잦아들면, 또다시 붉어진 네 얼굴을 보고 웃던 날들이 내려왔다.


"뭐랄까..."


좋았다.

정말로, 그때는.


기분이 잠시 마음에 머물렀고,

지후는 그제야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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