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말하자, 첫사랑이 떠올랐다.

프롤로그

by 태화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감정은 자주 길을 잃는다.

나는 너를 처음 사랑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마주쳤던 순간, 세계는 갑작스럽게 멀어졌고 동시에 가까워졌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벅찬 착각이 들었다. 두 쪽난 하루는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물감이 번지듯 흐려지는 하루 속에서도, 너와의 장면들만은 유난히 또렷했다.

우리는 이미 잊히거나 잊혔거나, 혹은 그 경계 어딘가에 멈춰 서 있다. 아무리 애써도 더는 꿈꿀 수 없는 꿈이란 걸 알면서도. 발자국조차 남지 않을 길 위로 걸음을 옮긴다.


첫사랑이란, 세계의 크기를 처음으로 체감하는 일이었다.


***


한지후는 서랍 맨 안쪽에서 나온 낡은 사진 한 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한켠에 소년과 소녀가 다정히 서 있었다. 먼지 쌓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계절을 증명하듯 흐릿하게 바랬다.

보이지 않은 세상 속에 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앞머리를 손등으로 쓸어 올리며 웃던 아이. 새햐얀 겨울을 닮은 피부를 가진 아이.

지후는 그 이름을 입안에서만 굴려본다.


정유진.

그 이름을 떠올리는 일은 버거우면서 아련했다. 언제나 현실로부터 반 발짝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일 같았다.


[지후님 이번의 새로운 작품 내일까지 검토 부탁해요.]


지금의 그는 출판사 편집자이다. 내일이면 회의실에서 새로운 로맨스 원고를 검토해야 했다.

사람들의 사랑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랑은 백지장으로만 존재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일은 덮어버린 마지막 페이지와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꺼낸 와인 잔과 유리컵이 나란히 놓여 있다.

어느 쪽도 먼저 손이 가지 않았다. 감정이 아닌 판단의 결과였다.

이성이 만든 임시적인 균형. 작은 손짓에도 가장 먼저 깨질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다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께 인사 갈까?”


그 말은 분명히 약속과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후의 가슴속에는 이유 모를 공허가 먼저 고였다.

그는 대답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을 스치는 미지근한 맛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완벽한 순간이라는 것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언제나 지나간 뒤에야 그렇게 불리는 것뿐일까.

그가 알고 있는 ‘완벽’이라는 단어는 항상 과거형이었다.


지후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빛에 바랜 유진의 미소는 현실의 색감을 잃고 있었다. 한 사람의 얼굴이라기 보다는 개념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처음 미술실에서 마주한 그 아이, 첫눈 내리던 날 손을 잡고 서 있던 그 아이도, 이제는 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하나의 형태에 가까웠다.

머릿속에서 부여한 의미와 상징이 겹겹이 쌓여, 원래의 유진을 완전히 덮어 버린 형상이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닮은 어떤 이데아인 건 아닐까.

실제의 유진이 아닌, 내가 필요로 하는 ‘완벽한 이해자’의 개념.

언제나 나를 이해해 주고, 기다려 주고, 실망시키지 않는 존재.

현실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을, 나는 한 사람에게 억지로 입혀 두고 있는건 아닐까.


전화 화면을 켜자, 최근 통화 목록 맨 위에는 ‘다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실수를 잘하고, 가끔은 약속 시간을 헷갈리고, 화가 나면 목소리가 먼저 커지는 사람.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지후는 이상할 만큼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진을 내려놓지 못했다.

손끝에 닿는 얇은 종이의 감촉은 마치 오래된 신화의 파편처럼 느껴졌다.

믿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이지만, 믿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안전한 이상처럼.

지후는 알고 있었다.

유진은 이미 그의 현실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 순도 높은 이데아로 정제된 그녀라는 것. 아직도 그의 사랑의 척도로 남아 있다는 것을.


그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는, 어쩌면 다영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현실의 사람을 사랑할 용기가 없어서, 여전히 손에 닿지 않는 이상 속에 숨고 있는 자신 때문에.

지후는 사진을 다시 서랍 깊숙이 밀어 넣는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만 남기는 거니까...”


그는 다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저녁에 시간 돼? 할 말이 있어.’


그 문장이 향하고 있는 곳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혹은 아주 느린 미래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완벽하지 않은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