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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May 21. 2024

젊은 날의 수영

젊은 날의 포기는 빨랐다.

"오늘 어디서 만날까?"

"미안. 보고서를 내일까지 넘겨야 해서... 이따가 퇴근하고 연락할게."

"응.. 그래... 수고해."


부서 내 막내인 남자친구는 선배들의 일처리를 도맡아 정리하느라 야근이 잦았다. 부모님은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30평대 아파트에 나 홀로 생활하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 익숙한 시절이라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것도 어려웠고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니 적막함은 마음속에 구름을 띄우려고만 했다. 집은 더 이상 포근하지 않았고 잠만 해결하는 하숙집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됐다.

바깥에서 시간을 쏟게 되자 남자친구와의 시간이 더 절실해졌다. 그가 야근을 하게 되는 날이면 하루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도 연애하기 바빠 나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방황하며 터벅터벅 걷는 내 모습이 그렇게 후져 보일 수 없었다. 우울과 자존감이 땅을 치던 어느 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단지 내 헬스장 광고를 보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록했다. 입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실에 마련된 체력단련실은 헬스기구 몇 개를 조촐하게 구비해 놓고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러닝머신 외에는 사용법을 몰라 나머지 기구에 대한 사용법을 스스로 익혀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내향적인 성격에 혹시라도 만지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낯선 운동기구에는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았다. 게다가 어설픈 사용법에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주변인들에게 보이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흔하디 흔한 러닝머신 벨트 위에 다리만 연신 밀어내는 단순 노동만을 되풀이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헬스는 단순노동에 무료함을 느끼고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진출처 : 픽셀스

군대 간 남자 친구의 기다림은 만기 전역이라는 끝이 존재하지만 회사 간 남친의 기다림은 사직서를 쓰지 않고서는 희망의 끈이 보이지 않았다. 꽃처럼 예쁜 20대에 연애에만 힘을 쏟고 자기 계발에 눈을 돌릴 생각을 못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퇴근 후 화려한 불빛의 술집과 식당들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는 나만 외로운 세상 속으로 등 떠미는 것 같았다. 항상 걷던 길인데 그날따라 ㅇㅇ스포츠센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카운터로 달려가 고민도 없이 수영을 등록했다. 매일 퇴근 후 저녁을 건너뛰고 비장하게 스포츠센터로 향했다. 수영복을 갈아입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갔다. 같은 성별이라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여자들과 맨몸을 까는 건 어색했다. 초짜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의연한 척 수영복을 몸에 끼워 넣는다. 젖은 몸에 탄성이 강한 수영복을 끌어올리려니 말을 듣지 않는다. 실밥이 뜯어질 듯 염려가 되는 순간에 어렵싸리 몸에 안착되었다. 강력한 탄성은 볼록하게 존재감을 내뿜는 살들을 매끈하게 다림질해 주는 장점이 있었다. 내장지방으로 똘똘 뭉친 똥배도 눌러줘 거울에 비친 몸매 라인이 매우 흡족했다.


"자, 수영 처음 하시는 분, 이쪽으로 오세요."


햇병아리처럼 쫄랑쫄랑 강사님을 따라 첫 번째 레인 물속으로 들어간다. 샤워실의 따듯한 물줄기와 달리 수영장 물온도는 친절함이 1도 없었다. 쿨내 진동하는 짜릿한 물과 첫 대면을 하고 킥판을 의지해 몸을 띄웠다. 발로 첨벙첨벙하고 몇 바퀴 돌고 오면 수업은 끝이 났다. 1주 뒤 강사님이 킥판을 빼고 해도 되겠다며 남들보다 먼저 킥판을 졸업했다. 나쁘지 않은 수영과의 만남은 운명처럼 느껴졌고 의욕이 상승한 만큼 체중도 줄었다. 하지만 좋았던 만남도 잠시 킥판을 빼고 자유형을 하면 꼬르르륵 밑으로 가라앉아 처절하게 물맛을 보게 되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나보다 진도가 느렸던 회원들은 자유형을 완벽하게 해냈고 배영으로 넘어갔다. 자괴감과 몸치의 한계를 맛보고 두 달 만에 수영과 작별을 고했다. 자유형과 배영을 멋들어지게 하는 그들에게 풀장의 넉넉함을 선물하고 씁쓸하게 퇴장했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포기가 참 빨랐다. 선택의 폭이 넓고 도전하면 무엇이든 가능한 나이였기에 오히려 한곳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다. 철없고 나약했던 20대의 시절은 아쉬움으로 가득했고, 수영과의 인연은 그날로 끝이 난 줄 알았던 기억과 함께 옛 남자 친구와의 추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진출처: 픽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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