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전 경유지 : [서종 테라로사]
숨소리만 들릴 뿐 기척마저 없는 적막한 주말 아침이다. 잠을 계속 부여잡고 싶은 그 순간, 남편의 핸드폰에서 원망의 멜로디가 울리고 만다. 남편은 알람을 손가락으로 쓸어 멈추고 내비게이션 앱부터 열어 도로 상황을 살핀다.
"일어나자. 길 막히기 전에 출발해야지."
남편의 재촉에 잠도 안 깬 몸을 어렵사리 일으킨다. 파워 P성향인지라 출발 한 시간 전에 짐을 싸기 시작한다. 1박 2일 강원도 여정쯤은 단골코스라 챙겨야 할 준비물이 머릿속에 인이 박혀있을 정도다. 휘뚜루마뚜루 짐을 싸다 보니 빠트리는 준비물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내여행의 장점은 어디서나 말이 통하고 바로 구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없으면 사면되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까지는 하지 않는다. 출발 당일 짐 싸기는 스피드가 관건이다.
아이들을 서둘러 깨우고 준비시켜 차에 밀어 넣는다. 특히 집돌이 둘째를 설득시켜 신발 신기까지는 인내심의 바닥을 한번 찍고 올라와야 성사되는 일이기에 마음이 너덜너덜한 채로 집을 나선다. 두 아이를 차에 앉혀놓기까지 이미 하루치 여행의 기운을 다 쏟은 느낌이다. 물에 젖은 빨래처럼 힘없이 무거운 몸을 조수석에 털썩 안착시킨다.
봄끝, 초여름의 화창한 날씨 덕분에 이미 내비게이션은 양양 휴휴암까지 4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차 안에서 낮잠도 안 자는 아이들인데 어떻게 4시간을 버텨야 할지 여행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갈까 싶은 마음마저 든다. 출발과 동시에 뒷좌석은 이미 주먹질과 발길질로 기나긴 여정의 1라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인내심의 한계가 또다시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적당한 협박과 적정선의 목소리 톤으로 상황을 종결시킨다.
이쯤 되면 남편이 내 안색을 살핀다. 카페인을 수혈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줘야 할지 상황을 판단한다. 와이프의 평화는 곧 가정의 평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남자다. 덕소삼패 IC를 지나면서 남편이 묻는다.
"거기 갈래?"
거기라면 내 최애 장소 중 하나인 카페로 항상 강원도 여행을 갈 때마다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내심 남편의 '거기' 소리가 언제 나올까 기다렸는데 듣고 나니 반가우면서도 태연한 척 네가 제안했으니 그래 한번 가보자라는 식으로 쿨하게 대답을 해준다. 서종 IC에서 통행료를 계산하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북한강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힐링이 시작되는 스폿이다.
강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서 아이들과 실랑이한 불편한 감정을 해소시킨다. 3분 정도 달리고 나면 빨간 벽돌과 벽돌 사이로 하얀 시멘트가 샌딩 된 거친 질감의 공장 같은 건물이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차장을 들어서면 빨간 벽돌로 가득 채워진 건물 정면에 'TERAROSA COFFEE' 카페 이름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 맞닥뜨리는 이 거대한 건물의 첫인상과는 달리 카페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카페 외에도 유럽 거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상점들이 예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골목에 세워놓고 유혹한다. 직접 뜬 뜨개이불, 머리핀, 유기농 야채와 유기농 참기름, 유정란, 당근식혜 등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음식들을 여기에 오면 건강한 먹거리로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대신 지갑에 얇아질 수 있음에 주의를 요해야 한다.
상점을 구경하기에 앞서 시원한 커피로 마음을 식히고자 테라로사 카페로 들어간다. 앤틱 하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의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한층 더 카페의 분위기를 매료시킨다. 입구에 들어서면 테라로사의 다양한 굿즈가 판매되고 있다. 색색깔의 에코백, 초콜릿, 올리브유, 원두와 차 등 구경만 해도 시간이 꽤 소요된다.
아아 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지만, 여기에 오면 항상 시키는 메뉴가 정해져 있다. 바로 카페라떼다. 우유의 비릿한 맛을 싫어해서 라떼를 잘 먹지 않는다. 특히 스타벅스의 진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해 라떼를 시켰다가 처절하게 우유맛만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어딜 가도 라떼는 거의 시키지 않는다. 근데 테라로사는 라떼로 유명하다고 익히 들어서 도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주문해 봤다.
맛을 걱정하면서 모험에 도전한 나를 다독이며 기다리자 하얀 우유 위로 에스프레소가 얹어져 마블링되고 있는 컵 하나를 점원이 건네주었다. 소심하게 한 모금 조금 들이키자 원두의 강한 향이 코로 들어오고 원두맛 그대로 미각을 자극하면서 우유의 비릿한 냄새와 맛이 안나는 절묘한 맛이었다. 두 눈의 동공이 확장되면서 우유가 섞인 커피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특히 내가 테라로사를 더 애정하는 이유는 베이커리도 한몫을 한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베이커리는 공장형으로 찍어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여기 테라로사 서종점은 옆에 베이커리 만드는 곳이 따로 있어 직접 베이킹해서 판매를 해 맛이 좋다. 가격이 조금 비싼 건 흠이지만 맛을 생각하면 돈이 아깝지는 않다.
달지 않은 라떼에 달달한 피칸파이를 함께 곁들이면 놀라울 정도의 조화로운 맛을 느끼게 된다. 피칸파이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라떼를 들이켜면 적당한 단맛으로 중화되는 맛을 볼 수 있다. 여기 오면 세트로 시키는 내 최애조합 브런치가 된다. 레몬치즈 케이크와 까눌레, 쿠키도 엄지를 일으켜 세우는 맛이다.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 즈음, 남편과 아이들은 카페 옆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에서 시간을 보낸다. 비수도권 지역이라 개울 안 바위를 들쳐보면 개구리, 민물새우, 도롱뇽까지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생기기도 한다. 아이들은 카페에 도착하자 지난번에 개울가에서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던 개구리 알이 생각났는지 개구리를 잡아보자고 떠들며 들떠 있는 기색이었다. 남편에게만 애들을 맡긴 게 미안하고 고맙기도 해서 이제 그만 커피를 들고 개울가에 있는 아이들을 찾으러 나가본다.
이미 멀리서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목청껏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게 개울가에서 무엇이라도 잡은 듯하다. 역시 아빠와 두 아들은 개울가에서 무언가를 잡고 있다. 이미 둘째 녀석은 한쪽 발이 개울물에 빠져 흠뻑 젖어있었다. 큰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동생의 젖은 신발을 나에게 일러 받친다. 이미 카페인으로 심신을 적신 엄마는 모든 만행에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는 칠이 벗겨진대로 멋져보이는 의자가 중간중간 세워져있다. 아이들은 개울가에서 자연을 체험하고 부모는 아이를 보며 커피를 앉아 마실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의자에 앉아있으니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어떠한 음악보다도 기분좋은 자연의 소리다. 여름에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커피를 마시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러 와야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마음에 담아둔다.
둘째 아이가 투명컵을 들고 신나게 뛰어왔다. 아빠가 물고기를 잡아줬다며 내 얼굴에 들이민다. 눈에 바짝 갖다 들이밀어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고개를 뒤로 밀어 간격을 유지해 쳐다보니 얄궂은 민물고기 새끼들이 플라스틱 컵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 작은 걸 여러 마리 잡은 남편이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와이프의 표정도 밝아졌고, 아이들도 물고기를 잡아 신난 기색이 물씬 나는 걸 확인한 남편은 이제 목적지를 향해 가자고 팔을 뻗어 양몰이하듯 차로 데리고 간다. 와이프에겐 커피와 케이크를 사 먹으라고 카드를 내어주고, 아이들에겐 손품, 발품을 팔아 물고기를 잡아 헌신한 남편도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우리 가족 강원도 여행의 경유지에서 온 식구의 평화를 얻고 새로운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아빠, 몇 시간 남았어?"
"4시간."
"이만큼 왔는데 아직도?"
남편, 항상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