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니 Jul 31. 2024

'나'라는 경계인

자아는 변한다

내 이민 이야기는 사실 나 스스로의 선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난 해외에 나가 살고 싶었다. 그냥 나는 그랬다. 한국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한국이 나를 담고 있기엔 너무 작은 나라라고 느껴졌다. 왜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근거도 없는 자신감인데 그때는 그 어린나이에 그냥 막연히 '나를 담기엔 너무 작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어린시절의 열망은 부모님의 노력과 헌신으로 해외를 많이 나가게 되면서 더욱이 커졌다. 새로운 나라에 가보고 (동남아 나라들이었지만) 항상 "여기서 사는 삶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던것 같다. 외국 친구들을 사귀는것도 항상 즐거웠다. 기회만 되면 영어권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한국인인 '나'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과 말이 더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 뿐이었다.


8년전 이민을 할 땐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캐나다에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실 잘 다니고 있던 인서울 대학교도 그대로 휴학하고 캐나다로 향했다. 근데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드디어 해보고 싶었던 해외살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때 바로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았다. 그땐 열심히 일을 했다. 영어가 완벽했던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생활과 서바이벌 영어를 잘 했을 뿐이었다. 좋지 않은 직장 동료들과 상사의 가스라이팅으로 마음을 많이 다쳤었다. 만나이 스무살. 그 나이에 내가 뭘 알았을까. 그때 난 너무 순진했었다. 그저 이런게 사회생활인가보다, 부모님들도 많은 사람들도 이런걸 견디면서 일을 하나보다하면서 무던히 넘기려고 했다. 내 마음이 다쳐 상처가 문들어지고 있다는것도 몰랐다. 나는 그냥 그래도 괜찮았다. 그때는 괜찮게 느껴졌다. 


처음 매니토바로 이사를 결정하게 된 것도 가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매니토바란 곳을 싫어하는 마음보단 신기한 마음이 앞섰다. 원래도 친구는 한두명 밖에 없었던지라 이사를 하면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껴보진 않았다. 매니토바에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난 천천히 이 캐나다 사회에 물들어가는 경계인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그러니까 밴쿠버에서 나는 내가 캐나다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이민 프로세스가 끝난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가 캐나다를 잘 아는것도 아니었다. 현지 사람들의 영어의 사소한 차이도 잘 몰랐다. 인종차별도 당했다. 그 모든것을 고려하면 이민하는 과정이 '실패'인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안에서 보이는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 과정이 있어서 나는 더욱 조용하고 은밀하게 경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니토바에 와서 난 캐나다의 실상을 더 날것으로 체감했다. 대도시에서만 있어봤던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할 그 막막한 경험,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외계인이 된것 같은 낯설은 감각, 하나부터 열까지 발품을 팔지 않으면 녹아들 수 없는 사회. 그 모든 것들을 겪으며 나는 이곳에선 좀 더 당당하게 경계인이 되기 시작했다.


지난 6년이란 시간을 매니토바에 있으며 인종 소수자로 살아간 시간들로 나는 이제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게 좀 어색하고, 그들에게 내 행동이나 말 하나가 이방인으로 느껴질 것을 알기에 조금 더 조심하게 된다. 이번에 한국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다. 난 검은머리 외국인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한 캐네디언이 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조용히 경계인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한국인이지만 캐나다 문화가 좀 더 편해져버린 나

캐나다가 편하지만 그래도 한국이 그리운 나

일상에서 90퍼센트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

하지만 한국어로 글 쓰는것도 읽는것도 좋아하는 나

한국계 캐네디언 군인 남편과 결혼한 나

캐네디언 학교에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비교하는 나


나라는 자아를 찾아보니 모든 경계에 있는 내가, 그런 나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적어내려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 매거진이다. 경계인이라 정의할 수 있는 나는 진정한 경계인이라고 볼 수 있는가란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면 글쎄 답을 모르겠어서 내려써가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라는 자아는 매번 바뀐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서야 내가 경계인이라는걸 알게된 나의 자아가 어떻게 변할지 친철한 궁금증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