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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런 Dec 15. 2023

그 해, 아버지와 나

2화_프리퀄(1) 아버지 이야기

1996년 이른 봄, 일명 ‘막일’라고 불리던 건설 현장 일로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는 일을 못 구한 화창한 어느 목요일 오후 적막함이 깃든 집에 홀로 계셨다. 몸 쓰는 고된 일을 하는 아버지에게 쉬는 날이 과연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우리들의 주말과 같이 느껴졌을까? 하루 일당을 받는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의 쉬는 날은 편안한 마음으로 육체적인 피곤함을 달랠 수 있는 달콤한 휴식 시간이 아닌 일거리가 없어 하루 일당을 벌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그런 날이었으리라.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살던 집은 세를 주기 위해 지어진 오래된 단독 주택으로 2층 주인집 중문을 기준으로 좌우로 방 2개가 나뉘어 있는 우리 네 가족에게 허락된 작은 공간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동 화장실을 쓰는 다세대 주택의 단칸방에 살았던 것에 비하면 누나와 나를 위한 책상과 침대를 새로 들인 작은 방의 존재는 잠시나마 가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른 방 하나는 주방으로 이어져 있었고, 주방을 지나서야 화장실로 갈 수 있는 억지스러운 방 2칸, 주방, 화장실의 구조였다. 우리 네 가족의 독특한 공간에는 삶의 고단함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함께여서 행복한 '가족'이 주는 따뜻함, 그리고 단칸방에서 방 2칸으로 세를 옮겨온 것처럼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한쪽 모퉁이에 분명히 존재했다.       




마음 편히 쉴 수만은 없는 휴일, 평소 부지런한 아버지는 느지막이 일어났다. 90년도 40대 아저씨를 상징하는 듯한 사각 트렁크 바지에 흰색 민소매 러닝 차림으로 화장실 역할에만 충실한 욕실을 향한다. 세면대는커녕 무릎 높이의 수도꼭지에 바닥에 닿을 듯한 높이로 연결된 초록색 호스를 통해 나오는 찬물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좁은 주방을 지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옷장을 향해 오른발을 방바닥에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순식간에 빠졌고 중심을 잃은 몸은 방바닥에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체 신체의 오른쪽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우측 전신에 마비가 온 것인데, 오른쪽 안면부터 오른팔, 오른 다리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왼쪽 부분에 대한 통제력은 남아있었다는 것이었고, 불행인 것은 오른쪽 안면 마비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팔, 다리, 눈과 같이 좌우가 독립적인 신체 기관은 한쪽의 마비에도 다른 한쪽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하나인 기관, 즉 입은 왼쪽 부분만으로는 본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고,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는 왼쪽 팔다리를 움직여 쓰러진 채로 전화기가 있는 곳까지 어렵사리 기어갔다. 의식은 있었기에 왼손을 이용해 어머니의 직장으로 전화를 할 수 있었으나. 오른쪽 안면 마비로 입이 움직이지 않아 제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웅얼거림은 장난 전화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몇 차례의 장난 전화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받자마자 끊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쓰러진 채 소득 없는 전화로 시간을 보냈고, 20여분이 지나서야 근처에 혼자 살고 계시던 장모님을 생각해 냈다. 외할머니도 장난 전화로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반복되는 전화에 딸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어머니는 본인이 받은 장난 전화를 떠올리며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외할머니가 집으로 급히 오셨고,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사투를 벌이느라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는 사위를 발견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할머니는 근처 약국으로 가서 약사에게 집에 함께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고, 약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119에 신고를 한다. 구급차는 하교하던 나의 앞을 황급히 지나 집을 향했고, 그 사이 어머니도 집으로 도착한다. 구급대원은 의식 확인 후 들것에 실어 가까운 병원으로 아버지를 이송했고, 나는 그 모습을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지켜보았다.




뇌경색, 좌측 뇌혈관의 막힘으로 인한 일상생활이 어려운 수준의 후유증을 안은 채 약 한 달간 한의대를 비롯한 몇몇 병원을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희망적인 소식은 마비된 신체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회복 할 수 있다는 소견이었다. 재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60% 이상까지도 움직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치료와 요양을 위해 몇몇 곳을 전전하다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시 가족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아버지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부모님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재활을 시작한다. 고단함과 작은 희망으로 채워진 집에서 외롭게 쓰러져 살고자 발버둥 쳤던 날로부터 3개월 후였다.      

고된 재활은 새로 돋아난 파릇한 잎이 뜨거운 햇살 아래 몸집을 키우고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에 단풍잎이 되었다가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에 떨어져 하얀 눈 아래 그 자취를 감출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저마다의 초록을 간직한 풀과 나무, 산에 들에 알맞게 놓인 바위와 돌, 얕고 느리지만 꾸준히 흐르는 냇물로 둘러싸인 재활을 위한 공간은 힘들고 외로운 재활운동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의지와 노력으로 아버지는 6개월 정도 후에는 절뚝거리기는 하지만 혼자 거동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했고, 곧 농사일도 거들 수 있었다. 가족만을 생각하며 그 고된 시간을 견뎠을 아버지는 서울까지 혼자서 다녀갈 수 있는 최소한의 몸 상태가 되자 우리를 보기 위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고, 누나와 나는 아버지와 기쁜 마음으로 재회했다. 하지만 혼자의 몸으로 사춘기 중학생 딸과 철없는 아들 그리고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 많이 있었고 삶이 일방적으로 맡겨버린 가장으로서의 무게는 마음에 깊은 골을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처음 다녀간 이후 3~4개월여간 짧지 않은 길을 몇 차례 더 왕래하며 함께했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려 했지만,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원망의 깊은 골은 끝내 메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본인이 나고 자랐던 시골 마을로, 어머니는 누나와 함께 새로운 집으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둘로 갈라져 한쪽을 남겨놓고 떠나온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재활을 위해 혼자 시골을 향했던 때와는 달랐다. 아버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불완전한 모습이긴 하지만 엄연히 가족의 형태였고, ‘사랑하는’ 아들이 함께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불안과 상처를 안고 휴학을 선택한 아들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다시 살아야 한다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아직 불편한 몸과 아이들의 삶에 상처를 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되기 위해 일어서야 했다. 그리고 다시 삶을 찾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혼자 그리고 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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