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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멍 Nov 18. 2024

그럼에도 내 삶을 변호한다면

심판 - 프란츠 카프카

우리의 죄

  어느 화창한 화요일 아침, 끙끙 앓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승준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세요."

"책을 읽는데 작가가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네."

"뭔데요?"



  흠…. 11살짜리 애한테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뭐 들으면 머리 아프다고 친구랑 땅 파러 가겠지, 가볍게 고민을 한 번 꺼내 보기로 한다.



"이 책의 작가는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대. 왜 모든 사람에게는 죄가 있는 걸까?"



  그러자 승준이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답을 내놓는다.



"당연하죠. 인간은 살기 위해 빼앗으면서 살잖아요. 고기를 먹기 위해 돼지의 생명을 빼앗고, 자동차를 타기 위해 환경을 더럽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살면서 죄를 짓는 거예요."



  이렇게 명쾌할 수가. 우리는 산다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 존재였다. 나는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살기 위해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죄악의 삶을 단죄하는 의미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선고받는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죄를 짓고 있음에도 생명을 이어 나가야 하는 이유를 대야 한다. 수많은 악행을 반복해 저지르면서도 목숨을 이어갈 만큼 나의 삶이 가치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내 삶의 이유를 '변호'해야 하는 것이다. 삶은 내가 쌓아가는 죄에 대해 무죄를 호소하는 소송 과정과 같다. 이렇게 무슨 죄로 고소당했는지, 누가 고소했는지, 판결은 누가 내리는지, 변호는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태어나자마자 사형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부조리한 소송이 시작된다.



부조리한 삶, 무의미한 삶

그러니까 한 번도 무죄 판결이 없었군요. /심판, 193p

  이 소송은 근본부터 부조리하다. 일단 죄를 지은 당사자는 태어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세상에 던져졌고, 마침 산다는 게 죄를 짓는 행위였다. 또한 한 번의 행위로 단번에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태어난 당시의 우리는 결백하다. 사형을 선고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말 부당하게도 우리의 소송은 전혀 다른 방식의 절차를 따른다. 소송절차가 진행되면서 죄가 점점 쌓이고 그렇게 부풀어진 죄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사형 선고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송은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다. 부당한 소송에 억지로 떠밀린 우리의 삶은 부당하기 그지없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사형이라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은 어떤 이유로 변호하든, 재판 결과를 미루는 것에 그친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내가 주장했던 삶의 가치는 녹이 슬 것이고, 나는 또 다른 살아야 하는 이유를 대야 한다. 마치 아무리 애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부조리를 넘어 무의미하다.



나의 변호

될 수 있는 대로 변호인을 배제하고 피고 자신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 심판, 151p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이다. 내가 저지르는, 또한 곧 저지를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이 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상쇄할 만큼 가치 있을 수 있을까. 일단 시작은 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겠다. 필요한 만큼의 살육만을 저지르며, 분에 넘치지 않을 만큼만 빼앗으며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지만 이것은 내 앞으로의 죄를 좀 더는 일일 뿐, 내가 지은 죄를 모두 없애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심을 내려놓도록 설득하며 살아야겠다. 당신들이 오늘 먹는 음식은 누군가의 내일을 죽여 얻은 것이니 낭비하지 말자고, 당신이 오늘 벌어들인 돈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강탈한 것이니 아깝게 생각하자고 이야기해야겠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널리 알려야겠다. 다행히 나는 미래 사회 구성원을 가르치는 교사다. 어찌 보면 다가올 미래의 모습은 일정 부분 내 손으로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만날, 혹은 만나지 못할 수많은 나의 제자들에게 함께 욕심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자고 그렇게 이야기해야겠다.



  물론 나도 안다. 난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내 평생을 다 바쳐도 기껏해야 몇 사람 정도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내가 모든 사람의 욕심을 내려놓게 만든다 해도 그것이 내가 지어온 죄를 다 없앨 수도 없다. 모두 쓸모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일도 나는 학교로 출근하여 욕심부리지 말자고, 내려놓고 살자고,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며 살자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백 번 곱씹어 생각해도 그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길이기 때문이다.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속죄의 길, 내 삶 또한 다른 이들처럼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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