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흐른다 - 로랑스 드빌레르
1년 전, 형이 고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래는 힘들게 헤엄치지 않아.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고 노는 것뿐이야. 근데도 1년에 지구를 2바퀴를 돈대. 나도 고래처럼 흐르지만 부지런한 삶을 살고 싶어.”
당시의 나는 형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1년 전의 나는 부동산 공부에 심취하여 삶의 정답을 알았다는 오만함에 갇혀 있었고, 구체적인 삶의 목적 없이 떠다니기만 하는 고래의 삶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나에게 삶은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며, 이 통제할 수 있는 삶을 그저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보였다. 나는 바보가 될 수 없었다. 삶의 목표를 정해서 10년 단위, 1년 단위, 한 달 단위, 1주일 다시 하루 단위로 쪼갰고 매일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으며 바쁘게 살았다. 사실 아파트를 분석하는 게 즐겁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뚝 서서 돈으로 자유를 쟁취한 나 자신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랬다. 때로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 나 자신에 취해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올해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동산이 하락하여 난생처음 빚도 져봤고, 대안학교로 일터를 바꾸었다. 부동산 하락장을 통해 인생이 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며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삶은 바다와 같아서 나의 의지로 통제할 수가 없다. 삶을 통제했다고 오만에 빠진 순간 생각지 못한 폭풍우에 난파되어 버린다. 그게 나의 1년의 모습이었다. 이제야 나는 고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함께 흘러야 한다. 삶을 통제하려 들지 말고 삶과 함께 모험을 떠나야 한다. 고래처럼 말이다.
우리가 삶을 통제하려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마주할 어려움, 새로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두렵다. 왜냐면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에 내 앞에 놓인 미지의 세계가 두렵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미래를 알아야 한다.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시도는 언제나 물거품이 된다. 삶은 인간과 달라서 쉽사리 옛것을 답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항상 새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아직 모른다’는 것은 단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지의 세계는 아직 열리지 않은 보물 상자와도 같다. 그 안에 고난과 역경이 담겨있을 수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 고난과 역경이라 생각한 것이 천천히 살펴보면 나를 강하게 하는 선물일 때도 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이 고난이든 즐거움이든 열기 전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설렌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과장된 두려움에 가려 설렘을 보지 못한다.
새롭게 배우고, 멋진 일을 찾고, 매일 같은 하루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알게 되면서 하루를 즐겁고 뜻깊게 보낼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을 한 하루,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순간, 무엇인가에 설레던 찰나, 이 모든 게 우리 삶을 물들이는 색이다. - 모든 삶은 흐른다, 180p
내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삶은 통제해야 하는 두려움이 되기도, 새로운 모험의 설렘이 되기도 한다. 삶을 모험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평범함 속에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눈, 새로움에 계산하지 않고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눈과 용기는 무익하고 무쓸모한 것에 기꺼이 마음을 내주는 넉넉함이 바탕이 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쓸모와 이익을 찾는다. 어떻게 서든 삶에서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기에 지금 이익과 쓸모로 보이는 일들이 사실 그렇지 않을 때도, 지금 무익과 무쓸모로 보이는 일들이 삶의 중요한 한 수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에서 이득과 쓸모는 그렇게 중요한 척도가 아닐 수도 있겠다. 보다 중요한 척도는 이것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인지, 나는 그것에 온 마음을 내주고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따위의 것들이 아닐까. 삶의 끝에선 노인은 손에 얼마나 많은 것이 쥐어져 있느냐보다 얼마나 다양한 색의 추억으로 삶을 물들였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까. 한 발자국 다가갈지, 반 발자국만 다가갈지 재지 말자. 마음이 알려주는 설렘을 따라가자. 다채롭게 빛나는 나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홀로 서 있는 섬처럼 우리는 누구와 똑같을 수 없다. 내가 아닌 '거짓 자아' 뒤에 숨겨진 나만의 섬을 되찾아야 한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 - 모든 삶은 흐른다, 140p
자아가 무거운 이유는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때문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만든 그것 말이다. 지금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 때문에 자아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정작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자아의 여러 이미지와 함께 살고 있다. - 모든 삶은 흐른다, 104p
나답게 사는 게 어려운 이유는 우리는 계속해서 자아를 살 찌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타인에게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법,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포장하는 법, 나의 가치를 설명하는 법을 배웠다. 어느 순간 내 삶의 목표가 스스로의 만족보다 타인의 인정과 존경에 집착하게 되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계속해서 넣으며 자아가 비대해진다. 고도 비만이 된 자아는 내 삶의 목표를 무겁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삶이 목표에 짓눌리게 한다. 쓸모없는 살덩어리를 걷어내야 한다. 싯다르타가 그랬듯,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에 나를 비춰야 한다. 사랑과 슬픔과 관계와 욕심에서 오는 집착을 넘어 내가 진정 바라는 나는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알아내야 한다. 그렇게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섬이 되어 나만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자. 타협하지도 모방하지도 말자. 다수에 속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지도 말자. 내가 존경하는 사람처럼 되기 위해 지나치게 서두르지 말자. 타인에게 관심 가지고 그들과 나누며 살되 무리하게 남에게 맞추지도, 무리에 휩쓸리지도 말자. ‘자기 자신’이라는 유일한 섬이 되자.
우리에게도 삶을 밝게 비춰주는 당당한 등대가 필요하다. 등대는 위로를 해주기도 하고 모범이 되기도 하며 자신 있는 가치를 상징한다. - 모든 삶은 흐른다, 136p
등대는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희망을 품으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고 일어난 일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다. - 모든 삶은 흐른다, 136p
삶과 함께 흐른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 없이 부유하는 삶과는 다르다. 우리는 바다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물살을 이용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항해에는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예상치 못한 파도에 휩쓸려 먼 길을 돌아가게 되어도,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안다면 나아갈 힘이 생긴다. 그러니 삶의 어느 순간에서라도 목적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등대를 세워야 한다. 등대를 세우는 재료는 나의 믿음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 그것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위로해 주는 기준이 되기도, 옳음을 실천하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쏟아지는 폭풍우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등대가 가리키는 한 줄기 빛은 살아갈 이유가 된다. 파도가 거셀수록 우리는 더 단단한 등대를 세워야 한다. 등대가 밝게 빛나는 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