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멍 Nov 20. 2024

아픔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기에

나로 존재하는 법 - 헤르만 헤세

  평범한 사람의 삶을 정상이라고 잣대를 정한다면, 내 삶은 불량품이다. 4살 때 엄마에게 버려진 후 가슴에 큰 구멍이 생겼다. 이 구멍은 나로 하여금 사랑과 존경을 계속 갈구하며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구멍 주위에는 결핍의 색이 칠해져 있다.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난 후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나서부터 가난은 늘 내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난은 삶에 못을 박는 것과 같아서, 뽑아냈다 생각이 들어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영원히 남긴다. 가장 문제인 것은, 이런 뻥 뚫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내 가슴 안에는 '잘살아 보고 싶다는' 의지가 거세게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지는 나의 타고난 욕망, 결핍과 버무려져서 기이한 고집들을 만들어냈다. 성공에 대한 집착,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는 태도, 뒤틀린 사명감이 그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나를 요령을 모르는 바보처럼, 때로는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으로도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 꼬리표를 타고 들어가면 그 끝에는 구멍이 뚫려버린 내 삶을 어떻게든 틀어막아 보려는 유약한 내가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이 너덜너덜한 삶을 긍정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누나, 내 곁에 머물던 고마운 사람들. 이 사람들은 나에게 '삶은 의지로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늪 같은 삶에서 그 희망 하나로 여태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지금,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삶의 절차를 밟아가는 친구들과 반면 하루가 다르게 추해지는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며 김광석의 노래처럼 삶이란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느낀다. 내 삶을 바꿔가리라는 희망도 청춘의 빛나는 순간과 함께 조금씩 이별하고 있는 요즘이다. 삶은 점차 개선해 나갈 수 있으나, 운명처럼 내 삶에 주어진 것은 영원히 바꿀 수 없음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부정하며 괴로워했다. 나의 결핍을 떠올리게 하는 부모님을 한동안 찾아뵙지 않았다. 결핍이 떠오를 때마다 애써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며 모른 체하고자 했다. 부동산이 어떻고, 요즘 시장이 어떻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고, 저 길은 내가 버린 것이라고 위안 삼았다. 누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떠오르는 불안함을 감추려 노력했고, 어쩌다가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상처받기 전에 먼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고장 나버린 삶을 나에게 내려준 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웅크려 잠드는 나날이었다.




가지 달린 떡갈나무 - 헤르만 헤세

사람들이 너를 얼마나 잘라대었는지
나무야, 넌 낯설고 이상한 모습이구나.
어떻게 백 번이나 고통을 견디었니.
반항심과 의지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나도 너와 같단다.
잘려 나간 고통스런 삶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야만을 견디며 매일 또다시 이마를 햇빛 속으로 들이민단다.
내 안의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이 세상은 몹시도 경멸했지.
하지만 내 존재는 파괴될 수 없어.
나는 만족하고, 화해한 채로
백번은 잘린 가지로부터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낸단다.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이 미친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기에.



  하지만 이대로 삶을 놓아버리기엔 나는 내 삶을, 내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사랑하기로 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주어진 운명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어쩌면 내 결핍마저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가난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행복한 가정, 당당한 자아를 이룬 친구들 곁에서 여전히 삶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뜬구름 잡는 이런 똥글이나 끄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나. 이게 나인데. 책과 글을 좋아하고, 노래와 그림을 좋아하고, 목표도 계획도 이루고자 하는 것 하나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 사회가 정한 그 어떤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 내가 정한 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이런 불량품으로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묵묵하게 나의 길을 걸어가는 불량품으로서.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세상에 남는 것은 사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