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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Feb 12. 2024

다들 해피엔딩인데... 나만 새드엔딩인가?

   오랫동안 따랐던 친한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나를 남편이 일하는 사무실에 소개시켜주어 처음으로 제대로 월급을 받고 일할 기회를 주었고, 오랫동안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내 정서를 지지해주고 늘 웃음으로 내 상황과 우울을 환기시켜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절대적이었고, 나는 그녀를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따르고 좋아했다. 그러던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에게 세 번이나 연락이 왔지만 울리는 전화를 바라보며 나에게 다짐했다. ‘받지 말아야해. 끝을 내야 해. 여기까지가 끝이야.’     


 우리의 시작은 참 좋았다. 그녀는 앗쌀한 성격에 오지랖이 넓고, 정이 많았다. 넉넉한 성품은 아니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호오가 분명해서 비위 맞추기 힘들었지만 한 번 마음을 주면 사람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거울 같은 사람이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나는 그녀에게 불안한 내 정서를 그대로 투영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지치고 질려 나가떨어질 법도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내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서 자기만의 색깔로 긍정적으로 바꾸어 웃음으로 나에게 돌려주는 그녀가 편안했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한다. 우리도 그렇게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유순하기만 했던 내가 점차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거절을 해야할 때는 거절도 해봐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런 나의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역이고 반항이었다.      

 내가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그녀의 거친 분노는 아무리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신은 내가 거절할 수 없고, 거절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조절되지 않고 조절할 생각도 없는 그녀의 감정으로부터 필터를 거치지 않고 출발한 그녀의 말은 가스라이팅이 되고,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 고생을 했다.      


 그녀와 헤어지면서 나는 결심했었다. 굶어 죽더라도 여기선 일할 수 없다. 더 이상 호구지책을 걱정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그녀와의 헤어짐은 나에게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했다. 나는 나로 살고 싶었고, 나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탈출했다.      


 오랜 세월 의지했던 사람과 헤어지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상황은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인간관계는 대개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니 모두 둘중의 하나였다.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맞추고 맞추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 내가 어느 날 잠수를 타던지, 아니면 가스라이팅에 고통받고 힘들어하다 죽을힘을 다해 탈출하던지.     


 어머니와 동생은 기회가 있으면, 불리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어머니는 병원가는 날 이웃들에게 병원간다 말하는 것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젊은 애가 아프다고 한다고. 약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존심 없는 행위이고 결국은 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이고 가식이고를 떠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단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자라서 모자라다고 하는 것이 왜 자존심이 상할까? 그건 그냥 그런건데...      


 오랫동안 사랑받고 아낌을 받은 경험이 없어서 나는 사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아쉽지 않고, 그런 내 무딘 마음이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특성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장점과 강점만으로 나를 내세워서 찬란해 보이지만 사실은 허술한 나를 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정서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 동정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나에게 마음을 열고 안쓰럽게 생각해주고 도와주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환자였고, 언제나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 말은 실제로 그녀의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에게 나의 약점을 알린 것이 잘못이었을까? 현명한 자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한다. 그녀에게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나는 정말 아팠다. 불안정하고 어디 마음 붙일 곳 한 군데 없이 마냥 흔들리기만 했다. 그녀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나는 내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환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그녀는 그런 나를 오랜 동안 정서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녀는 실제로 나에게 가족도 해주지 않는 보살핌을 해준 것이다.      


 나는 진짜 나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처음에는 다 호의로 사리분별이 어두운 나를 도우려고 했다. 거기에는 도와달라는 나의 애타는 간청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 충고가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는 점점 독해지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나를 재단하려는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발전되는 것이다.      


 겸허히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내 탓이었다. 내가 부족해서 그랬다. 내가 내 사리분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했을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였다.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만약 잘했더라면, 그냥 충고를 들었을 때 취사선택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 내 것으로 만들고 끝냈다면 모든 관계가 원만하고 순조로웠을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고 좌충우돌 아등바등하며 열심히 살아냈다. 잘 버텼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정되었다. 더 이상 나는 불안정하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 붙일 곳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안에서 나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관계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예전에 그 사람의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변해왔듯이 상대도 변했는데 늘 과거에 머무는 것이다. 변해버린 나와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고 관계가 변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끝날 수밖에 없다. 더 이상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람, 평생 이 사람만큼은 보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간절했던 사람. 늘 의지했고 고마웠던 그녀를 졸업하며 스쳐지나가는 인연은 스쳐지나가도록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예쁘지 않았다. 그럴듯하지도 못했다. 나는 쿨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따듯하지도 않았다. 아플 때 아프다 말 못 했고, 서운할 때 서운하다 말 못 했다. 뒤뚱뒤뚱 절룩절룩 허우적거리며 대충 살아온 것이다.     


 나는 나를 만나준 사람들과 진짜 나로 만났을까? 나는 솔직했고, 모두 내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게 다일까?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얼굴을 보아줄 사람이 이 세상천지에 그 어느 누가 있을까?     

 인연이 찾아왔을 때 미리 헤어짐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남에 큰 방점을 찍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내 인생을 산다. 남들은 모두 해피엔딩인데 홀로 새드엔딩을 맞이하더라도 그것이 내 인생이라면 그냥 내 것일 뿐이다. 두손 모아 해피엔딩을 기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 또한 내 그릇만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스쳐 지나왔던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누구와도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다. 인사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불화하여 다툼을 하고 헤어진 것도 아니다. 섭섭함을 입밖으로 내어 항의를 해보지도 못했다. 만남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지러졌다. 그러나 불완전한 나를 받아주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그러나 내가 스쳐 지나온 그들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들을 통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다. 그 인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후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하얀 얼굴에 파마머리를 하고 눈빛을 빛내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호탕한 말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상실감에 몸을 떠는 것도 아니고 좌절감에 고개를 떨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사람을 잃었다. 


 오늘은 새드엔딩이지만 내일은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꿈꿀만큼 이제 나는 순진하거나 무지하지 않다. 그러나 나의 새드엔딩도 나름 나에게 의미있고 소중한 내 인생의 모퉁이인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의 해피엔딩을 보고 들으며 부러움에 고개를 빼고 눈을 반들바들 거리지만 나의 새드엔딩을 내 인생의 갈피에 잘 갈무리하며 보듬는다. 아름답지 않아도 멋지지 않아도 나의 역사, 나의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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