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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Feb 05. 2024

사실은 그저 편안함을 선택했을 뿐이다.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가 싫었다기보다 내가 엉덩이 힘으로 오랜 시간 눌러앉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공부를 해서 뭔가 남들이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장사를 하고 싶었다.  큰돈을 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악세사리 가게. 손님들이 마실 오듯 들려서 내가 마련 해놓은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고 만지작거리다 결국 하나둘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소소한 행복을 꿈꾸었다.      


 고3 학력고사를 보고 대학입학 원서를 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아버지와 진로에 대해 우연인 듯 우연 아닌 듯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악세사리 가게가 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리 시간을 두지 않고 그렇다면 150만원을 대주실 수 있으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80년대 중반에 지방 소도시에서 150만원이면 작은 악세사리가게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그 금액의 크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서 내 가게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지 그걸 알지 못했다.    나는 고작 고3이었고, 가게는 어떻게 얻는 것인지, 물건은 어디서 떼어오고, 가격은 어떻게 붙여 팔아야하는 지 전혀 가이드가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바로 즉답을 주셨듯이 나도 즉답하기를 바라셨다. 그렇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뭐가 가능한지, 뭐는 가능하지 않은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던 내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 부동산 쪽을 공부해 보기를 권하셨다. 브로커란 내 자본 없이도 큰일을 할 수 있고,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자기 영역을 가질 수 있는 분야라고 하셨다. “아빠 딸이라면 대학은 나왔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셨다. 그렇게 악세사리 가게를 하고 싶어했던 소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 가게 되었고, 어울리지 않는 공부라는 것을 계속하게 되었다. 공부한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내가 왜 수동공격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름 구구하게 할 말이 많지만, 이제 와 선이 무엇이고 후는 무엇인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드러나는 갈등을 회피하면서 반작용으로 인생을 해이한 자세로 대하고, 주어진 일을 해태 하였을 때 그 결과는 비단 시간과 돈의 낭비 뿐은 아니었다.


적당한 타협으로 누구에게도 불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항상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적당한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서 늘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그 결과는  부모탓이 되고 원망이 되고 아픔과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점점 뒤로 후퇴를 계속했다.      


 만약 인생 2회차가 되어 다시 고3 겨울방학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아버지에게 150만원을 가지고 내 가게를 시작해 보겠다고 즉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첫 째, 나의 꿈은 그냥 몽상가적인 말 그대로 백일몽이었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던 어린 여자아이가 그냥 예쁜 거, 좋은 거, 갖고 싶은 거에 둘러싸여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그냥 회피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 세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무조건 필패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이다. 내 주변에는 그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직접 가게 자리를 알아보아야 하고, 물건을 떼올 구매처를 알아보아야 하며, 그래서 초도 비용이 얼마인지를 계산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도 언제까지 어떻게 얼마를 벌면 정상궤도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예상할 수 있어야 했다. 트렌드도 알아야 하고 내 손님들은 어떤 계층을 대상으로 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지금도 벅찬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아주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알아보고 시작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할 수 있게도 되었다. 그런데 시작을 어디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배울 데도 없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일의 무게가 산더미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 딸은 대학은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희망하고 계셨다. 어릴 적 어머니와 불화했고 그래서 그만큼 아버지에게 경도되어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아버지의 말을 거스를 만큼의 힘은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어린 시절 소떼를 돌보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꿈에 욕망이라는 여인과 미덕이라는 여인이 갈림길에 서 있었다. 욕망이라는 여인은 자신을 따르면 쉽게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덕이라는 여인은 자신을 따르면 고난과 고통은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헤라클레스에게 말을 건넸다. 헤라클레스는 진정한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나는 선택을 했다.      


 나는 욕망을 선택했을까?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않음을 선택했다. 적극적으로 욕망을 취하지도 않았고, 또 적극적으로 자아의 성장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세월에 비켜, 세상에서 벗어나, 성장을 선택하는 대신 퇴행을 해버렸다. 그리고 그때의 그 엉뚱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 허둥지둥 황급하게 그동안 이연해 둔 지난 내 나이를 다시 살아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다.      


 이제 나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수많은 아픔과 미련이 남지만 후회하는 일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수동공격형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부딪혀 봤어야 했다. 해봐야 했던 것이다. 욕망이던지, 미덕이던지 그 갈림길에서 분연히 선택해 온전히 내 것의 역사를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의도대로 나를 몰고 가시려는 뜻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계속 고집부렸다면 나를 응원하시지 않으셨을지라도 말씀하신 150만원을 주셨을 것이다. 결국 실패하고 대학이라는 길로 다시 들어섰을지라도 아버지가 나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걸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만 결정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행동하면 되는 거였다. 실패든 성공이든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떤 결과이든 참된 나만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비추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는 빛나고 멋진 인생을 살게 되었다면 싫었을까? 정직하게 말해서 아닐 것이다. 아마 아버지 덕이 아니라 스스로 잘난 탓이라고 생각하며 잘 누리고 잘 살았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큰 부분 현재의 내 삶이 스스로에게 불만족스럽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에 비추어서 하는 말이다.       


 인생 2회차를 만났을 때 나는 악세사리 가게를 선택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수동공격형으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목소리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악세사리 가게를 하고 싶다는 의미가 진정으로 그 장사를 하고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희망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아버지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내가 희망하고, 내가 원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았을 것이다. 나의 자의식이 나에게 말한다. ‘지난날을 후회하지 말라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치라고.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정면승부 해보자고.’      


 대학교 2학년 때 한 여대 어학당에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나에게 교수님께서 너는 고등학교 때 해야 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인생의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다. 다들 앞서 나가는 데 혼자 뒤쳐져서 뭉그적거리며 느릿느릿 뒤따라 가는 것이다. 아마 앞서 간 친구들의 결승점이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이제 나는 앞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목표를 세워보려 하는 내가 깨닫는 것은 지금 내가 바로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냐? 아니면 미덕이냐? 나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주제파악을 하다보니 욕망이 다가온다.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행복한 글쓰기를 하며, 가끔 좋은 사람과 밥을 먹는 치열함에서는 벗어난 일상적인 행복이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치밀하게 분석하고, 고뇌하고, 행동하여. 원하는 성과를 내고 사람들 간의 경쟁에 머리를 들이밀고 참여해서 나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성취와 보람의 삶은 선뜻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나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은 빨리 내려야 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편안하고 일상적인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다만 나는 참 아쉽다. 한 번도 열정적이지 못했던 내 삶이. 모든것을 걸고 무언가에 투신해 다 불살라 보지 못했던 내 인생이 나는 참 아쉽다. 마치 다 타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린 연탄 같은 내 인생을 다시 불살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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