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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Mar 04. 2024

내 이웃의 얼굴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누구와 이웃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 - 루이스 빌     

 

 이웃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편하게 농담하고, 웃을 때 같이 웃으며, 진짜 친해지고 싶었다. 그와 헤어지며 알게 된 것은 인연이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연은 꼭 합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반도 역시 인연이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은 일종의 패배 의식에서 출발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커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살면서 늘 뒤처지고 밀려나는 경험이 계속되면서 그냥 그렇게 외톨이로 늘 혼자인 것이 습성이 되었다.      

 

 그런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너무나 행복해 하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란 저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야간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의 사장님이었다.


 말주변이라고는 없는 내가 사장님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고, 사무실을 드나드는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게 되면 내 인생은 업그레이드가 되고, 나는 사장님을 딛고 다음번 스테이지로 뛰어 올라갈거라고 남몰래 야심을 키우기도 했다.      

 

  그때를 돌이켜 내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내 기준에 따라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장님이 원하는 것보다 나는 내 체면과 입장이 중요했다. 느닷없이 고객에게 원망과 비난을 받으며 밑도 끝도 없는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돈을 주는 것은 사장님이었는데, 싫은 소리 좀 듣기 싫다고 무시한 것이다. 그에 대하여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사장님은 나를 아우르려고 애쓰셨다. 그분은 매일 퇴근할 때 차를 태워주셨다. 대화하는 법을 몰라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나에게 못 알아듣겠다고 반문하시면서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밥 먹고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 친해진다고 새벽에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만나는 모임에 초대도 해주셨다. 그는 친절했고, 나는 배려받았다.       


 보기드문 훈훈한 이야기 같은가? 여기까지이다. 나는 그에게 항상  다른 사인을 받았다. 사무실에는 아르바이트인 나 말고 여직원 하나와 남직원이 더 있었는데 그는 그들에게 늘 신뢰와 감사를 보냈다. 그들은 업계 베테랑들이었고 일도 잘했다. 더욱이 근태도 좋았다.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성실하게 나와주는 것이 고맙다고 때때로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하는 자신의 팀 속에 내가 속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나와 교대로 일할 사람의 첫 근무날이었다. 사장님은 다른 여직원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길게 설명하며 그녀에게 소개했다. 그렇지만 나에 대해서는 이름 하나 보태지 않았다.      


 살면서 많은 이별을 해보았다. 손절도 당해봤고, 내가 일방적 잠수로 끝낸 관계도 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토록 이별을 염두에 두고 관계를 이어갔던 적은 없었다. 나는 그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는 것을 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잊지 않도록 그가 나에게 계속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우린 한 팀이 아니야. 우린 끝이 있어...     


 나는 끊임없이 작지만 명백히 뇌물인 간식거리들을 갖다 바치기도 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더라도 가능할 때면 새벽 밥 먹는 자리에 가 앉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같은 것이 없었다. 삶의 태도, 지향, 환경, 공통된 화제도 없었고, 웃음 포인트도 친해지는 방법도 달랐다. 그래도 싫은 내색 없이 가겠다고 말해도 괜찮을 시간까지 버텼다. 고통스러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매 순간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왜 일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답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일이 재미있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일 하나하나는 별 것 없었지만 완결하고 처리되면 보람이 있었다. 동네 마실 나와 스치는 사람에게 건네는 잠깐의 목례 만큼이나 가벼운 고객들과의 만남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즐겁게 그 일을 했다.        


 그렇지만 나도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직원이 아니라고. 거기에는 늘 자기 팀과 나를 구분하는 사장님에 대한 반발도 있었겠지만 그가 싫어하든 말든 내가 나를 소개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말했다. 그 사무실에서 나의 위치는 분명 아르바이트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규칙대로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의 규칙을 따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떳떳하면 얼마나 떳떳하고 정당하면 얼마나 정당하겠는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사장님에게는 사장님의 생각과 판단이 있고, 일하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나는 매사 다른 사람의 간을 보면서 사는 것은 반대이다. 고객의 이력은 그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 있는 지 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바가지를 씌울 때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고객의 신뢰를 배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항의하는 고객에게 준비된 변명 또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장님과 나는 그렇게 생각이 달랐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늘 확인했으며, 의식적으로 아우르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든 섞이려고 애를 쓰는 것과는 별개로, 무의식적으로는 너는 내 사람이 아니라고 항상 서로에게 일깨웠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날이 오고 말았다. 나는 글을 쓸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그곳을 사직한 것이다.      


 주야로 일하는 게 힘들고 아파서 그만둘 생각을 했을 때에는 아쉬움과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 때문에 그만둘 때에는 털끝만큼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었듯이 나는 한 팀이 아니었고, 내가 알고 있었듯이 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친구는 내 미래라는 말이 있다. 만나면 반갑고, 어울리면 즐거운 친구가 지금 나의 현재이고, 그렇게 살아낸 나의 현재는 곧 나의 미래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에게 친구를 가려 사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친구는 가려 사귈 수 있을까? 어떤 친구와 친해지고 싶고,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이미 그 사람과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즐겁지 않는 자리를 얼마나 견딜 수 있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초라한 나의 미래를 내 곁의 친구에게서 읽을 수 있을지라도, 친구란 늘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다.      


 사무실을 그만둘 무렵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내갸 처리한 일을 다른 여직원이 모질게 비난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자리에 우리 모두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실수는 그녀가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과받지도 못했고, 그들은 오히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궤변으로 엉뚱하게 그녀를 옹호했다.      


 그들에게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병가지상사가 아닌가?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은 나머지 하나로서의 내 위치를 나에게 명확히 각성시켰다. 그들은 기억도 못 할 소소한 작은 해프닝으로 나는 그들과 완벽히 결별했다.      

 

 애초에 내가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않았을 때 사장님은 나를 잘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사장님의 입장을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면 그만두었어야 했다. 누가 서로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사실을 알면서 강 건너에 서서 바라보며 부질없이 손짓만 한 것이다.      


 사장님을 만나 달라진 것도 많고, 정리된 것도 많고, 깨달은 것도 많다. 그는 나를 현실의 인간관계 안으로 돌려놓았다.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늘 미련을 두고 매달려 왔다. 이제 더 이상 관계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 맞닿은 인연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경계가 분명해지고 나서야 관계가 동등해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을 나는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닐 때에는 미련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하여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곁에 머물렀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세상에 속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나는 내 세상, 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힘들 때마다 나를 다독이며, 잘 버티면, 잘 어우러지면, 퀀텀점프를 할 수 있을 꺼라고 위로했던 것처럼, 나는 그를 딛고 인생의 다음번 스테이지로 올라선 것이다.      


 나의 이웃은 입맛에 맞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입장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시절인연으로 만나 영향을 주고 받고, 내가 성장했다면 그는 내 인생의 좋은 이웃이고, 훌륭한 스승이다.      


 선망했지만 너무나 까다로웠고, 절대 동의할 수 없었던 그가 모든 인연은 끝이 있다는 교훈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에게 배운 대로 그를 잘 보내주려 한다. 미련 없이. 고마움 가득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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