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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의 행복

by 날마다 하루살이

명절 외출이다. 명절이면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나는 대도시에 있는 시댁으로 나간다. 작은 군 단위 도시에서 태어나 이곳에 자리 잡은 내가 유일하게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시간은 바로 명절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이 내게는 특별함이 된 지 오래되었다. 반듯반듯 건물들 사이, 좁다란 샛길, 또다시 넓은 대로... 골목들 사이사이 보이는 맛난 가게들, 사람들의 북적거림, 복잡하게 얽힌 샛길들 중에서 비교적 넓은 길에 조성된 작은 공원의 나무들까지 모두 다 새롭다. 내겐 도시의 빌딩숲이 신세계이다.


뇌졸중으로 누워 계신 엄마의 손발이 되어드렸던 지난날. 한 시도 곁을 떠날 수 없던 그때. 동생에게 며칠 엄마를 맡기고 신혼여행을 다녀왔고, 결혼 후에도 명절 때마다 동생에게 맡겨두고 시댁을 다녀와야 했던 그때. 난 그 도시의 밤거리를, 근처 공원을 걸으며 자유로움을 느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는 잠시 잠든 틈을 타고 그 시간을 누리고파 잠깐 외출을 했던 어느 날에는 잠들었던 녀석이 깨어 울고불고 난리 났다는 아버님의 전화를 받고 성치도 않은 무릎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달려야 했던 그 거리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높은 건물들과 화려한 조명들은 그저 그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새로운 감각을 자극시켰다. 그 거리를 걸으며 느끼던 자유로움은 내게 선물 같았고 신선 함이었다.


집에서 커피하나 프림 둘 비율 맞춰 마시던 커피를 뒤로하고 길거리를 걸으며 '테이크아웃'커피도 마시는 다소 색다른 경험을 하고 빙긋 미소 짓던 그때. 어려웠던 시아버님을 잠시 피해 막내동서와 함께 걸으며 시댁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위로로 숨 쉴 수 있었던 날들도 그 거리 곳곳에 숨어 있다.


한동안 어두웠던 마음이 이제 조금 가라앉았다. 여러 일들이 끊이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런 일들이 지나간 뒤에 다시 마주한 그 거리가 다른 기쁨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평화로움을 느끼며 또다시 걷는 그 거리. 시댁에서 요 몇 년간 이어지는 일들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아버님이 안 계시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문제는 이어지고 있었다. 명절은 가족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이긴 하지만 피로 맺어진 것이 아닌 가족은 다른 색깔을 품고 있었다. 오랜만에 새로운 기분에 젖어 그 거리를 걷는다. 옆에 남자가 인생커피라 칭하는 커피도 마셔보고, 신혼 때 걷던 그 자유를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강릉 가면 커피맛이 다르다던데 이 커피만큼 특별할까

벌써 붕어빵도 나와 있고 또... 우리 둘째가 좋아하는 귤도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상하게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 왠지 가격이 싼 느낌이다. 한 봉지 집어 들고 당당하게 계좌이체를 했다. 촌스런 아줌마는 이런 것조차 새롭다.

아저씨는

"이윤정 님 맞으시죠? 네, 들어왔네요~"

라시며 뒷말을 덧붙이셨다.

"요즘 이런 거로 장난치는 사람들도 있어서요."

"아, 네~ "

"추석이니까 요건 덤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귤 2개를 덤으로 더 받고 좋아할 둘째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옆에 남자는 횡재라도 한 듯 좋아한다. 이 남자가 웃으니 나도 따라 웃는다. 이런 것으로도 장난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도대체 어떤 모양일지 잠시 상상해 보았다.


시댁 가면 꼭 먹고 싶은 피자가 있다. 화덕에서 구워주는 피자인데 이번에도 사러 갔다. 키오스크로 결재하고 돌아 나오면 그뿐이지만 난 왠지 기분이 좋다. 주위의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다. 피자 가게 주인이 딱 걸려버렸다.

"저, 시댁 올 때마다 여기 피자 꼭 먹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피자집주인도 기분 좋고 나도 좋다. 나로 인해 누군가 잠시라도 기쁨을 느낀다는 것 자체도 좋다.

'피자 도우가 특별히 더 맛있어요~'라고 덧붙여줄걸 그랬다.


노래를 들어도 그 노래를 듣던 날들이 떠오르듯이 특정 거리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렇게 즐겁게 떠올릴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돌아온 것에 감사하다. 한동안 작은 즐거움을 잊고 지낼 만큼 머릿속이 엉켜있었는데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고 정리되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회복의 시간이었던 거 같다. 놓아줄 것은 과감하게 놓아주는 것, 받아들일 것은 거부할수록 힘들어질 뿐이다. 잘 다듬어서 내 모양새에 맞게 받아들일 일이다. 그것은 행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인가 보다.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두는 것이라 여기자. 난 그 흐름을 타고 가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자.


그날 그 거리에서 설레던 오래전 나를 만났다. 그 설렘을 만난 나는 하루 전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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