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파운드의 살을 가져라. 한방울 피도 흘리지마라

Take thy pound of flesh...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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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thy pound of flesh; But take not a drop of blood; nor less or more,


<베니스의 상인>의 유명한 대사이다. 4막 1장의 포샤의 대사로서, 핵심 논리를 보면 계약서는 살 1파운드만 요구할 뿐 피를 허용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일록이 살을 자르는 과정에서 피가 나오면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나 샤일록은 처벌받게 된다. 포샤는 샤일록의 계약 문구(a pound of flesh)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되, 이행 조건을 극단적으로 좁혀서 샤일록이 계약을 실행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법리적 장치를 그대로 이용하는 것으로서 법의 엄격한 문자 해석으로 상대를 옭죄는 전형적인 변론술에 해당한다. 포샤는 법의 문구를 악용하여 권리를 주장한 자가 같은 문구의 빈틈에 걸려들게 하는 역공을 펼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법의 엄격한 문자적 해석이 정의보다는 권력이나 교활함의 수단이 되는 경우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헛소동(Measure for Measure)>에서 안젤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법을 이용한다. 비엔나 공작이 자리를 비우며 엄격한 대리통치자 안젤로를 세우는데, 안젤로는 낡은 도덕법을 집행하려 한다. 클라우디오라는 젊은 남자가 혼인 전에 결혼을 약속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에 그의 누이 이사벨라가 안젤로에게 자비를 청한다. 안젤로는 그녀가 자신에게 몸을 바치면 동생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여기서 안젤로는 법의 글자 그대로의 엄격한 집행을 주장하며 처벌을 정당하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다. 법의 엄격함은 결코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욕망이나 권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희곡이라 하겠다.


이 희곡을 읽는 독자나 극을 보는 청중은 처음에 샤일록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할 때 그의 주장과 논리가 타당함을 인정한다.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포샤가 법 문구의 빈틈을 이용해 역공을 펼치자 그의 논리는 기막힌 재치로서 관객에서 충격을 안겨 준다. 이때 이 희극이 보여주는 극적이고 드라마적인 효과는 최고조에 달한다. 사실 샤일록은 안토니오가 자신을 여러 번 무시하고 모욕한 적이 있어서 앙심을 품고 있었다. 안토니오가 자신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조롱했다며 보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토니오가 빚을 못 갚으면 그의 살 1파운드를 가져가겠다는 조건의 계약서를 쓴 것이다. 샤일록은 상대에 대한 앙심을 품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사정을 자세히 들어보면, 결코 몰인정한 나쁜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만은 없다.


포샤는 실제 여성이지만 법정에서 남장(disguise as a man)하여 등장한다. 그의 남장은 이 희곡에서 어떤 의미일까. 남장은 법과 권력의 본질과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법정에서의 권위는 실제 인물의 성별이나 도덕성과는 분리되어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고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 나설 수 없었다. 남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지성과 판단력, 논리력, 법 해석 능력을 공적으로 발휘하게 된 것이다. 남장은 이렇게 여성의 능력이 제약된 사회에서는 여성도 지적, 도덕적 권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라 할 것이다. 포샤는 법의 기술적 해석으로 판세를 뒤집는데 결국 남성보다 더 뛰어난 재치와 논리력을 보여주었다. 성별보다는 행동과 능력으로 평가되어야 함이 더욱 공정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그녀의 남장은 여성도 사회와 정의의 중심에 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언이라 하겠다.


처음부터 포샤가 법의 기술적 해석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앞서 “자비는 강요할 수 없다(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ed)”고 말하면서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샤일록에게는 자비가 통하지 않자 법의 기술적 해석으로 그를 패배시킨다. 그런데 재판 장면을 보면 자비도 위선적이고 법도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억압받는 소수자(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나마 법으로 자신의 처지를 구제받아야 하는데, 법의 기술적 해석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비를 내세우는 다수의 비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불리해지자 강력히 고수했던 자비의 논리를 버리고 법의 잣대로 판단하려 한다. 이쯤 되니, 이 희곡은 누가 약자이며 보호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확산된다. 억압받는 소수자 유대인 입장에서 샤일록은 계약과 법을 근거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그 권리 행사는 비유대인 사회, 시민권, 법정의 편견 등 사회적인 권력구조에 의해 좌절된다. 다수의 비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고 시민권을 가졌기에 결코 약자가 아니다. 법의 문자적 적용으로 그들의 정의가 실현된 것이라고 과연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진정한 정의일까.


법의 문자적 해석과 판결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는 현대사회에 일어나는 판결에서도 보인다. 지난 1년동안 비슷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도 많이 있었다. 법이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야 하는데 결코 그러지 못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혹자는 그것을 정당한 법적 절차라 하고, 혹자는 그것을 법기술이라고 한다. 법에 규정된 대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면서 정당한 절차와 논리로 법을 적용했다면 누가 그것을 법기술이라고 부르겠는가. 분명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누군가의 사적 이익에 부합하는 절차대로 적용했기에 피해를 보지 말아야 할 사람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법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희곡은 읽을 때마다 공정한 재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법의 문자적 적용으로 실현된 정의가 과연 진정한 정의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의문을 품게 된다. 법과 정의, 자비와 권력, 도덕과 질서 사이의 긴장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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