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I be waspish, best beware my string.
카타리나: 내가 말벌 같다면, 침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페트루치오: 그렇다면 내 해결책은 그 침을 뽑아버리는 거지.
If I be waspish, best beware my sting.
My remedy is then to pluck it out.)
『말괄량이 길들이기』 2막 1장에 나온 카타리나의 대사이다. 페트루치오가 카타리나를 처음 찾아와서 청혼을 시도했는데 대면하자마자 말싸움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장난과 은유를 주고 받으며 기 싸움을 한다. 이 대사들은 어쩌면 희곡 전체를 관통하는 두 인물의 언어의 결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사는 분명 카타리나의 의도가 있다. 우선 이 말은 공격이 아니라 경고를 담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자기 방어의 말이다. 누군가가 카타리나를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녀는 언제든지 날개를 접고 부드럽게 날 수 있지만, 가볍게 여긴다면 언제든지 말벌의 독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찬찬히 들어보면 그녀의 대담함과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학원 시절 공부했던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The Bell Jar)』이야기를 해 보겠다. 교수님은 제목 벨자의 의미를 물으셨다. 무슨 의미 같냐고 말이다. 그냥 뭔가를 가둬둔다는 것, 투명한 뚜껑 등등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런데 하필 왜 제목이 벨자일까? 원래 벨 자는 실험실에서 표본을 덮는 유리덮개라고 한다. 유리 덮개로 산소를 차단당하면 그 안의 생물은 조용히 죽어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주인공인 에스더 그린우드는 보스턴 출신으로 매우 영리한 모범적인 여대생이다. 그녀는 글쓰기 실력으로 잡지사 인턴십을 따내어 뉴욕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매우 화려하고 완벽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후 공허와 혼란으로 채워진다.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성공한 여성들을 보면서 그녀는 차츰 그들의 삶이 속이 빈 겉치레 삶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회적 성공, 결혼, 순종 어떤 길도 자신을 온전히 담는 길은 아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여성의 역할에 회의를 느끼면서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불안감도 느낀다. 에스더는 인턴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 대학 장학금도 잃고 작가의 꿈오 흔들리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밤에 잠을 잘 잘수도 없고 글도 쓸 수 없어서 세상이 마치 벨 자가 되어 자신을 질식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느끼게 된다. 자살 시도에 실패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 요법과 정신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여전히 그녀가 불안해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벨 자는 머리 위에서 잠시 들어 올려졌을 뿐이다. 언제든 다시 내려 올 수 있다."라고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여성에게 주어진 착한 삶의 틀에 질식되어 가는 여성들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 같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실비아 플라스의 저항적 언어이다. 에스더는 여성에게 주어진 순종적인 삶에 반항하며 세상에 대한 불안과 분노를 내면화 한다.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과 내적 독백은 카타리나의 "말벌의 침"을 닮아 있으며 세상에 대한 경고와 같다.
유년 시절 어머니는 부엌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그중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한 한을 이야기하면서 왜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자식들 스스로 느끼게 해주었다. 외삼촌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범대학까지 나오셔서 교사가 돼서 아이들을 가르치셨는데, 어머니는 배움의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외삼촌을 매우 부러워 하셨다. 어머니는 그 한과 부러움을 그냥 마음으로만 삭인 것인 아니라 당신의 삶에서 하나도 허투루 보내시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주셨다. 매일 매일 열심히 살면서 가정 경제를 일으키시고 자식들 모두 끝까지 공부를 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포기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덮으려 하는 벨자를 끝내 거부하고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나타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를 한번 보자. 이 소설은 간통죄로 주홍색 A 글씨로 낙인을 받고 살아가는 헤스터 프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고개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녀가 보여주는 침묵은 사회적 낙인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여성의 저항이자 경고로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면이 다른데, 이번에는 자존심, 자존감은 누가 지키는 것인가의 측면에서 읽혀졌다. 이 소설에서는 여성적 자존감을 이야기하고 있겠으나,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로 비춰질 때가 있다. 낙인을 찍고 찍히는 여러 상황이 있다. 청소년일때나 어른일 때나, 직장에서 혹은 사이버 상에서 얼마나 무수한 상황들이 있겠는가. 나를 지키기 위한 "말벌의 독침"은 무엇일까. 내가 사용하는 언어나 행동이 "이것은 독침"이라고 언제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나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독침이어야 하는데, 다른 이를 찌르는 독침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카르바조의 그림 중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라는 그림이 있다. 유명한 그림이라 독자들 대부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러 화가들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그림을 그렸지만, 이 그림은 다른 그림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목을 베는 매우 잔인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유디트의 표정은 비교적 잔잔하다. 그 침착한 표정은 자신의 행동이 복수보다는 경고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어떤 무엇보다 강력한 "독침"과도 같은 경고 말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자존감과 용기에 대한 그림이 아닐까.
다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카타리나로 돌아와보자. 이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매우 큰 용기를 지닌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벌같다면 독침을 조심하는게 좋을거야."라는 말을 어느 누가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이 곡을 쓴 시기는 1590년~1592년이니 당시의 여성들은 어떤 지위와 대접을 누렸을까.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었던 여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이 말은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자존감과 그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도 당당하게 할 말을 할 줄 아는 용기에 대한 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