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서서 생각하기
한때 나는 수많은 모임을 전전했다.
사람들과의 저녁 술자리, 끝없는 대화 속에서
나는 내가 ‘잘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곤 했다.
사람이 곁에 없으면 어딘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이 내 삶을 움직였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무언가의 일부로 존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더 상처로 물들어갔다.
나라를 달리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왔지만,
지금 그들 대부분의 안부조차 알지 못한다.
사람의 흔적은 만남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모임을 내려놓았다.
하루에 만나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로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닌 둘’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
사람들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이 찾아왔다.
여럿이 마시던 술 대신,
둘이 함께 영화를 보며 나누는 한 잔이 더 깊다.
접대할 일도, 접대받을 일도 없다.
부자는 아니지만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고급차는 아니어도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갈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내게는 충분하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도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
지금은 일요일 아침, 교회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아
하나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따뜻하다.
무리 지어 섬기는 대신, 고요히 머무는 신앙이 더 깊게 스며든다.
돈에 쫓기며 아등바등 살아온 시간들 끝에
결국 남는 것은 돈도, 사람도 아닌 ‘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묻고 싶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만
잘 사는 것이라 믿었을까?
정말 소음 속에 있어야 외롭지 않은 걸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여야만,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걸까?
누가 더 많이 벌고, 더 멀리 가고,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지가
인생의 답일까?
이제는 그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조용히 메아리친다.
조금 늦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고요한 답을 찾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