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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사무실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과장과 대리에게 인사한 후 지부장실 문을 연다. 얼굴이 동그란 육십 대 남자가 자리에서 내 인사를 받는다. 나는 문을 닫고 뒤돌아선다.
곧 부산에서 가져온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후임자가 오면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사항을 글로 적는다. 6개월 후에 내가 이곳을 그만두게 됨과 동시에 빈 공간을 메울 그 누군가에게 해줄 말이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그만둘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급하게 생각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날 때 해두는 것이 좋다. 해줄 말은 많지만 업무에 관한 것을 주로 적는다.
6시에 일어나야 할 거야. 사무실 주차장에 7시 20분까지 도착해야 하니까. 그런 다음 차를 몰고 당번 은행으로 가는 거지. 늘 은행직원들이 제 시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야. 당사자가 조금 늦게 나올 때도 있고 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이 늦게 나오기도 해. 그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제발 일찍 좀 나와요. 누군 잠이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해. 사실 우리 사무실은 은행에서 출자한 돈으로 운영되고 있어. …맞아, 우린 갑이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좀 더 일찍 출발해서 은행 앞에 기다리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 간접적으로만 가할 수 있는 압박을 가하는 거지.…비정규직이고, 우리 인생은 비정규직이야, 아무리 길어도 2년 이내에는 그만두어야 하는 파견직이니까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이 소모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어. 하지만 요즘처럼 일자리가 없으면 하는 수 없는 거야. 이곳저곳 골라 먹을 처지가 아니니까. 아, 그래 새로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니까 2년이라는 근로자 파견기간이 폐지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니야,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났다. S 카드사다. 그래,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몰라.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화장실로 향한다. 사실 그들 말대로 카드사가 내게 해악을 끼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내가 입금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었을 따름이다. 경기가 좋을 때야, 일이 잘 굴러가고, 좋은 직장에 다닐 때에야 그들과 관계가 나빠질 리 없다. 친구나 가족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다니던 은행이 합병되어 청원경찰을 그만둔 이후부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생활비를 빌려주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사채이자인 2부보다 비쌌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일단 재래식으로 누군가에게 돈을 빌릴라치면 내가 실업자임을 알려야했고, 곤궁한 처한 자의 비굴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혈육도 이런 사정을 들으면 돌부처처럼 외면해 버렸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해고를 당했으면 퇴직금이나 위로금 같은 것은 좀 챙겼지 않았느냐고? 그러면 나는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나는 정규직원이 아니었고, 소속된 용역회사는 일시에 터진 퇴직금 지불을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도피해버렸다, 고 구구절절 말해야 한다.
“오늘 내로 입금하실 수 있죠?”
내 의사가 중요하거나 내 처지를 감안해서,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다. 그들과 나는 이런 비인간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이게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인간적인 관계이다.
“아닙니다. 지금 돈이 없어서요.”
“그럼, 언제 입금이 되지요?”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정확한 날짜이고, 그 외의 어떤 말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녀도 그것이 무리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녀는 쪼다 보면 사람들이 별 짓을 다하여 갚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가리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상상을 한다. 복권이 당첨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복권이 당첨된다면 당장이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집을 내놓았는데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의 있게 말함으로서 허가 낸 사채업자의 고용인 태도가 누그러질 수 있다고 나는 잠시 믿어본다. 내 딴에는 성의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돈 빌린 놈이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가르랑거린다. 지금 이 순간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에 해당하는 말은 어떤 말일까? 이런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지구가 잠시 궤도 운행을 멈춘다고 해도. 응, 그래. 절대적 진리라는 게 있을 리가 없어. 지구를 떠도는 반편의 진리는 있어도. 그런데 이 말이 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까. 세 치 혀를 잘 놀림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내게 가르쳐 준 자는 누구인가.
“정 안되면 신용회복이라도 신청해 볼 생각입니다.” “뭐라구요?” 그녀의 말에 나는 더 힘을 주어 신용회복지원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말이 큰 실수임을 아는 데는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내 말을 받았다.
“흥, 그게 신청한다고 다 되는 거 아니거든요.”
“그래요?”
어리석은 나는 순간적으로 착각했다. 신용위원회에 신청을 하면 카드사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거기에 신청을 하면 카드사로서도 좋을 게 없는 것이었다. 나는 바보가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착각을 할까.
“오늘 4시까지 입금 안 하면 은행 연합회에 2개월 치 연체로 통보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추심이 들어가고요. 아는 사람한테 빌려 보세요.”
나는 마지못해 아니, 그녀와 더 이상 대화가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말했다.
“네.”
그 말에 겨우 저쪽에서 전화가 끊어졌다. 내 눈앞에 있던 그녀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미워지며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낱 돈 때문에 칼을 들이댈 수야 없지 않은가.
담배를 피워 물고 한동안 멍한 상태에 놓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식 둘을 껴안고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거야. 창문 틈으로 전면의 아파트 창문이 보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가는 나를 위해 있는가, 아니면 국가를 위해서만 내가 있는가. 나는 정부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지만 화가 치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