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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Jan 05. 2024

[르무통 X 동해안] 새하얀 마음으로 리셋

해파랑길 33코스



새해가 되면 하얀 마음이 된다. 텅 빈 도화지에 무슨 그림을 그릴까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 상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한 가지 의식을 치른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짐하는 일이다. 맑은 공기는 마음을 투명하게 만들고, 붉은 태양은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추암해변위로 해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다.


추암해변에서 보는 일출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 추암으로 향한다. 애국가 영상 초반부에 등장하는 추암 촛대바위는 새 마음을 품는 이들의 성지다. 어두운 새벽을 헤쳐,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추암에 모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해가 뜨길 바라는 해바라기가 된다. 어둠이 걷히면서 서서히 하늘이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물든다. 해가 뜨기 전부터 자연이 만든 색의 향연에 빠져든다.

바다 위로 새빨간 해가 슬며시 올라오면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진다. 태양은 황홀하고 강렬한 오렌지 빛을 바다 위에 흩뿌리며 빠르게 떠오른다. 긴 세월 매일 일출을 보았을 촛대바위에 눈길이 간다. 거센 동해바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늠름하게 서 있다. 촛대바위의 가냘픈 몸매에 안쓰러움과 경이로움이 함께 밀려든다. 

일출만 보고 발길을 돌리기엔 아깝다. 추암해변과 해암정을 비롯해 둘러볼 곳이 여럿이다. 해안산책로에는 바다 위에 길이 72m의 출렁다리도 설치되어 있다. 출렁다리 중간에는 투명한 구간이 있어, 넘실대는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다리 끝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석림과 해암정,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룬 풍경이 일품이다.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안겨주는 추암 촛대바위

 

동해안 최고의 힐링로드, 해파랑길 33코스

추암을 즐기고 난 후, 바다를 등지고 육지로 향한다. 해파랑길 33코스를 걷기 위해서다. 부산에서 고성에 이르는 동해안 걷기여행길인 해파랑길은 750km에 5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해파랑은 동해의 상징인 ‘해’와 바다색의 ‘파’랑, ‘~와 함께’라는 뜻의 ‘랑’으로 만든 합성어다. 50여 코스 중 바다와 숲, 마을을 골고루 지나는 해파랑길 33코스는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구간이다. 

33코스는 추암에서 출발해 전천강과 동해역, 한섬과 하평해변을 거쳐 묵호역 입구까지 약 13.6km에 이른다.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걷다보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멈춰서 오래 보고 싶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한섬해변부터 고불개, 가세, 하평해변까지 작고 아름다운 해변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파도를 보며 세월을 낚고 싶은 포인트가 많다. 


해파랑길 안내 표지판 및 띠지. 이 표시만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200년 전통의 오일장에서 시장 구경

추암에서 해파랑길 표시를 따라 걷다보면, 호해정(湖海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1947년 광복을 기념해 지역 주민들이 세운 정자로, 이곳에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목을 내려다본다. 근처에는 낚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 떼가 많기 때문이다. 이곳부터는 바다가 아니라 강을 따라 걷는다. 동해의 젖줄인 전천 강으로, 산책로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전천강의 잔잔한 물결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한가롭게 물 위를 떠도는 오리는 피곤함을 잊게 한다.  

강을 따라 걷다 북평교가 나오면, 끝자리가 3일과 8일인 날인지 아닌지 확인해야한다. 이 때 는 동해안 최대 오일장인 북평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장날이라면 장구경하는 재미를 놓칠 수 없다. 물건을 사지 않고 둘러보기만 해도 즐겁다. 정선에서 내려오는 42번 국도와 태백의 37번 국도, 남북으로 이어진 7번 국도가 만나는 위치 덕분에, 북평장에는 산과 바다의 물산이 넘친다. 역사도 무려 200년이 넘었다. 물총을 쏘아대는 오징어, 파마머리를 한 문어, 푸짐하고 맛있는 소머리국밥이 있는 북평장은 풍요롭다. 메밀전병과 묵사발을 비롯한 주전부리도 발길을 붙잡는다. 


이번 여행에 함께한 르무통 페이브 비니(그레이), 코지(핑크)

발 닿는 곳마다 포토존, 흥미진진한 한섬해변

북평장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전천강을 따라 걷는다. 길은 동해역으로 이어지고, 알록달록 예쁜 벽화가 반기는 송정동을 지난다. 정겨운 소나무가 반기는 해안숲길을 걷다보면, 해파랑길 33코스의 하이라이트인 한섬해변이 등장한다. 도심과 가까이 있어, 현지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해변이다. 모래가 밀가루처럼 고와 맨발걷기 운동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해변을 따라 데크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는 이도 여럿이다. 삼삼오오 모여 파도를 바라보는 여행자들의 모습도 정겹다. 그림이 그려진 테트라포트와 사진 찍기 좋은 터널도 있어, 여러 번 걸음을 멈추게 된다. 

한섬해변 끄트머리에서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그 길이 다시 끝날 즈음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경사가 급하진 않지만, 33번 코스를 걷다보면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을 자주 만난다. 아래로 내려가면, 몽돌해변이 기다린다. 아담한 몽돌해변에는 기원을 담은 돌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잠시 몽돌해변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모은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갈 때, 몽돌은 차르르 소리를 낸다. 맑은 소리에 가슴까지 깨끗해진다. 

계단에서 올라오면 숲길이 기다린다. 키 큰 소나무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초록빛을 뽐낸다. 소나무와 친구하며, 바다를 바라본다.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소나무 숲길이 끝날 즈음 나타난 철책보전구간 표지판에 발길을 멈춘다. 과거 북한군이 동해안을 침투한 사건 때문에 철책을 설치했는데, 2021년 대부분 철거했다. 당시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일부 남겨놓았는데, 바로 이 구간이다. 길지 않지만,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길이다. 


르무통 코지(핑크)와 함께한 한섬 해변에서의 포토 타임


고불개, 가세해변의 고즈넉한 매력

해파랑길 33코스의 매력중 하나는 낯설지만 귀여운 이름의 고불개, 가세해변에 있다. 언제가도 한적함을 누릴 수 있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앉아있으면, 괜히 부자가 된 기분이다. 고불개 해변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기기묘묘한 바위가 펼쳐져 있다. 바위 사이에는 진한 초록을 자랑하는 이끼류가 자라고 있어 남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최근에는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조형물도 설치해 놓아, 포토존으로도 사랑받는다.  

가세 해변에 도착하니, 동해가 고향인 친구와 조개를 캐던 추억이 포르르 올라온다. 잠시 벤치에 앉아 리베카 솔닛의 책 <걷기의 인문학>을 펼친다.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 편이 된 상태다. 오랜 불화 끝에 대화를 시작한 세 사람처럼, 문득 화음을 들려주는 세 음표처럼. 걸을 때 우리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라는 글이 마음에 스민다. 

가세해변에서 하평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근사한 전망대를 지난다. 이곳에 서면 드넓은 바다와 묵호등대, 논골담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노라믹 뷰를 자랑하는 곳으로, 쉴 수 있는 자리도 넉넉하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친구와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초록 이끼가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고불개해변

 

기차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하평해변

바다와 친구하며 걷는 길은 하평해변으로 이어진다. 하평해변 산책로 바로 옆으로 철도가 있어, 운이 좋으면 기차가 지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근처에 카페가 있으니 잠시 쉬고 와도 좋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시원한 바다를 감상하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하평해변을 지나면 묵호항역이 나온다. 과거 석탄을 실어 나르던 묵호항역은 화물선이 지나는 역이다. 과거의 화려한 기억을 품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 멋스럽다. 길은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철로와 주택가를 양쪽에 끼고 길이 이어진다. 소박한 집 옥상에는 가자미가 잔뜩 널려 있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낮은 집을 지나 큰 길을 만나면, 33코스는 끝난다. 

광활한 자연에서 시작해, 다정한 주택가에서 마무리되는 해파랑길 33코스. 피곤하기보다는 에너지가 충전된 기분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시작할 힘을 얻었다고나 할까. 2024년이라는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보기만 해도 평화로운 하평 해변 / 해파랑길 33코스의 마지막, 묵호항역


Info.

해파랑길 일부만 걸어야한다면 한섬해변에서 하평해변까지 구간을 추천한다. 이 구간은 대부분 바다를 즐기며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매력이 숨어있다. 포토존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른다. 1시간 정도 걸린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있으며, 중간에 편의시설이 별도로 없어 출발 전에 물이나 간식을 챙기는 게 좋다. 






[르무통 x 동해] 시리즈 작가 소개

채지형 여행작가


모든 답은 길 위에 있다고 믿는 여행가. 

시장 구경과 인형 모으기를 특별한 낙으로 삼고 있다. 


『여행이 멈춰도 사랑은 남는다』 『안녕 여행』 『여행의 힘』 『지구별 워커홀릭』 등 10여 권의 여행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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