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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직업은 난봉꾼

추억되지 않는 이름, 아버지...

by 정미선

저에게 아버지와의 추억은 참 비루합니다.

함께한 시절들이 별로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엄마에게 상처로 남은 존재...

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날부터 아버지는 집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셨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이삼일 동안 잠만 주무셨습니다.

깨어 있을 땐 주로 담배를 피웠고, 권투 같은 스포츠나 뉴스만 보셨지요.

그리곤 또 양복을 쭉 빼입고서는 집을 나섭니다.

언제쯤 오마 기약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학교에선 매년 가정 호구 조사를 했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도 싫었습니다.

월세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모여 사는 집이면 뻔하지요.

집에 냉장고가 있는지, 전화는 있는지, 엄마 아빠의 학벌은 어떻게 되는지...

저는 뭐 하나 변변히 적어낼 내용이 없었던 겁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직업란이었습니다.

"아빠! 아빠 직업은 뭐야?"

어린 제가 물어보면 아빠는

"응. 전기 기술자야."라고 대답하셨지요.

그게 뭔지 감도 오지 않는 제게 아버지는 더 이상의 설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전기공으로 일한다는 건 제가 열여덟 살 즈음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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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엄마를 힘들게 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오입쟁이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까요?

엄마가 며칠 집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셔서는 밥도 드시지 못하고 며칠 밤낮을 울기만 하셨지요.

몰래 들춰 본 엄마 베개 밑에는 시퍼런 칼이 놓여 있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떨었지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아버지가 일한다는 구미까지 찾아가셨지만

아버지에게 냉정하게 버림받고 온 것을요.

줄줄이 딸린 자식 셋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진작에 황천길로 떠났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빠의 바람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으니까 말이지요.

공사판에서 번 돈은 홀랑 외간 여자에게 갖다 바치고

집에다는 한 푼도 안 내놓았다지요.

제비 새끼마냥 입 벌리고 앉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버젓한 대학까지 보낸 엄마의 억척은 지금도 눈물겹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닐 때에도 아버지의 외도는 끝이 없었고,

직장까지 찾아와 백만 원, 이백 만원씩 돈을 받아가며 생활하셨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인 일흔이 넘어서까지

아버지의 오입질은 계속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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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부성애라는 말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훈계하거나 혼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릴 땐 그저 자애로워서 그런 줄 알았지요.

무관심해서 그런 거였다는 걸 나중에, 나중에서야 알고는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분개하고, 아버지 때문에 눈물 흘리는 엄마를 보는 일도 고역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보낸 후 저는 괴로웠습니다.

나에게는 그래도 아버지인데, 나를 낳아준 아버지인데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삭여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마음먹었습니다.

...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기로요.

자식들에게 변변한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주지 못한 아버지,

가장이라는 무게는 일찌감치 내팽개친 아버지,

아내에게 남자로서 든든하고 묵직한 사랑 한 번 안겨주지 못한 아버지,

제가 왜 이런 아버지를 두고두고 용서하지 못해 괴로운 날들을 견뎌야 한 걸까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용서하지도, 추억하지도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마음먹고 나자, 그 순간이 되자 제 마음결이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겁니다.

저는 그제야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한없이 부끄럽고, 누구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존재...

그 묵직한 올가미를 억지로 붙들고 있던 손을 놓자 마음이 한없이 맑아졌습니다.

때로는 억지스럽게 마음먹지 않아야 비로소 마음먹어지는 일이 있나 봅니다.

어린 날, 자전거 뒷자리에 저를 앉혀놓고 시골길을 달리던 흐릿한 아버지를

지금은 그래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늦게서야 아버지의 넋이 평안하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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